※ 실제 지명/인명/단체 등과 관련이 없는 가상 세계관 기반 글입니다
※ 라미레님의 창작 캐릭터인 타케미카즈치, 후츠노미타마가 등장합니다.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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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미카즈치. 히타치국 카시마 신궁에 진좌하였다 하여 카시마묘진으로 불리는 제신.
일찍이 천상의 명을 받들어 지상을 평정하고,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의 통치권을 천상계 타카마가하라에 이양시켰으며, 수많은 악신과 재앙을 토벌하여 굴복시킨, 명실공히 아마츠카미 제일가는 군신.
용감한 뇌신이요, 용맹한 무신이며, 지진을 일으키는 큰 메기조차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누르는 신위 드높은 도검의 신. 

"…이, 여기엔 대체 왜 온다는 거냐?"

시나노국, 스와의 신역에 있는 큰 궁에 자리한 옥좌. 푸른 옷을 걸친 대신(大神)이 턱을 한손으로 괸 채 투덜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빛은 사뭇 무거워 보였고, 팩 찌푸려진 미간이며 대놓고 일그러진 입술은 이 신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습만 보면 중차대사를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모리야노카미는 소매 속으로 손을 다잡으며 답했다.

"어찌하겠습니까. 딱히 카시마묘진께서 스와에 오시면 안 된다는 규약은 없습니다."
"……."

옥좌에 앉은 신이 이를 까득 악물었다. 그 입에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리야노카미는 이를 못 들은 체 했다. 바람과 물을 살피고, 신성한 스와 호수를 포함한 시나노국 일대를 관장하며, 쿠니츠카미의 군신으로 이름 높은 군신 타케미나카타, 통칭 스와님이 예의없게 혀를 찼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많이 곤란했다. 그런 보좌 신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와묘진은 옥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뭘 하고 가려는 거지?"
"사냥이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정말 사냥만 한다더냐?"

모리야노카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군께 거짓말을 고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스와묘진은 그 침묵에서 충분히 답을 읽었다. 그렇잖아도 심기 불편한 티가 역력한 얼굴이 한층 구겨지고, 뒤로 단정히 묶은 백발이 용솟음치는 신위를 따라 어지러이 흔들렸다.
…타케미카즈치는 용맹한 무신답게 그 무예를 뽐내는 사냥을 좋아했다. 히타치 지방에서는 카시마의 군신이 패기 가득힌 태세로 사냥터를 누비는 모습이 일종의 명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것은 좋은 일일 터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뇌신이 곧잘 시나노 지방, 그것도 스와까지 와서 사냥을 하고 갈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와는 예로부터 사냥 문화가 뿌리깊던 땅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타케미카즈치가 스와의 숲을 누빌 때면 산야가 남아나지를 않는 게 문제였다. 천둥번개의 군신이 그 신위를 자랑하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초목은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숲이 휘저어진 흔적이 몇 달은 남기 일쑤였다.

"명백한 도발 행위지, 이거."

스와묘진이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그가 주먹을 꾹 쥐고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것을 모리야노카미는 내버려두었다. 아무튼 스와묘진 타케미나카타에게 있어서 타케미카즈치는 일찍이 쿠니유즈리 때 그를 패배시키고 스와까지 쫓겨가게 한 신이었다. 스와까지 쫓겨간 타케미나카타가 목숨을 건지는 대가로 세 가지 약조를 했다는 것은 인간들에게조차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저승의 이자나미와 이승의 이자나기를 화해시킨 쿠쿠리히메조차도 이 둘은 화해시킬 수 없으리라. 모리야노카미는 담배라도 피고 싶어졌다.
그 때, 스와묘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화살통을 가져와라."
"쏘시면 안 됩니다."

모리야노카미는 그 자리를 뜨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스와묘진의 눈썹이 짜증에 꿈틀였다.

"내 영토에 들어와 횡포를 부리는 자를 가만히 둘 수 있겠냐!"
"상대는 아마츠카미의 필두 군신입니다. 함부로 건드려 좋을 것이 없습니다."
"나도 내 영토에서 사냥은 곧잘 한다. 어쩌다 실수로 날아간 거라고 해."
"그게 통하겠습니까?"

어이없다는 듯 받아치는 보좌 신의 말에, 스와묘진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바람과 같이 표표하고 물과 같이 차분한 군신께서 대체 이 무슨 어린아이 투정이신가. 타케미카즈치님 이야기만 나오면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부리는 주군에 모리야노카미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누굴 탓해야 좋을지 몰라 자신까지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모리야노카미가 생각하던 찰나, 스와묘진의 뒤끝 있는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사냥할 만한 짐승들을 죄 거두어 버리겠다."
"안 된다니까요."

모리야노카미가 눈을 부릅떴다. 스와묘진은 숨을 씁 하고 들이키며 옥좌에 깊이 등을 파묻었다. 높이 천장을 바라보는 군신의 눈빛은 아직도 불온한 기운이 드릉거리고 있었다.

 

* * *


스와 지방의 야트막한 산야를 흰 사슴들이 질주했다. 주인 되는 군신의 신위를 내려받은 사슴들의 발굽은 준마보다도 힘차고, 그 기세는 맹금류보다도 거셌다. 나무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는 신시(神使)들의 흐름이 도망다니던 멧돼지를 한 곳으로 몰아갔다. 나무에 부딪히고 신시들에게 쫓기던 멧돼지는 곧 커다란 암석에 부딪혔고, 이내 씩씩 성을 내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멧돼지가 어금니를 드러내고 돌진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미늘창이 멧돼지의 급소를 꿰뚫었다. 단말마조차 묻어버리는 그 창날은 마치 벼락 같았다. 아니, 실제로 벼락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터였다. 창을 꽂아넣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마츠카미의 용감한 뇌신 타케미카즈치였으므로.

"하하, 제법 좋은 사냥감인데!"

창을 뽑아낸 대신(大神)이 큼직한 멧돼지를 살피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의 신시인 흰 사슴 몇이 다가와 군신의 창에서 피를 닦아내고 사냥감을 옮겨갔다.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며 즐거워하는 군신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대답하듯 말했다.

"좋은 사냥감을 잡으셔서 다행입니다, 누시사마(주인)."
"아아, 그래. 하지만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해. 몇 마리 더 잡아볼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신검 후츠노미타마의 신령은 어딘가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끊었다. 비슷한 색의 옷, 다른 색의 머리카락, 다르면서도 어딘가 비슷한 분위기를 두른 이 신은, 타케미카즈치의 심복이며 그의 분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도검의 신령이었다. 그런 그가 잔뜩 신난 제 주인 옆에서 마냥 밝은 표정을 짓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좀 적당히 하시죠."

걱정과 근심이 서린 후츠노미타마의 목소리가 흘긋 뒤를 가리켰다. 신검의 시선이 지금껏 백록들과 제 주인이 달린 길을 돌아보았다.
나무들에는 맹수가 할퀸 듯한 자국이 그득하고, 그 중 몇은 가지 끝이 검게 그슬려 있었다. 바닥의 풀이나 덤불도 밟힌 자국이 역력했다. 그야말로 군세가 휘젓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뇌신의 위엄이라면 위엄이니 만일 이 곳이 타케미카즈치의 수호 영역인 히타치국이었다면 자랑스럽기도 할 터였으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히타치가 아니었다.

"여기가 스와묘진의 땅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모를 리가 있냐."
"그거 다행이군요.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는데… 좀 자중하시란 말입니다!"

후츠노미타마의 목소리에 근처의 새들이 황급히 날아올라 도망가버렸다. 백록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그쪽을 돌아볼 정도였다. 그러나 타케미카즈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창을 고쳐잡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왜?"
"왜겠습니까, 여기는 시나노국, 스와묘진의 영지입니다. 여기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휘젓는 건……."
"좋은 도발이 되겠지? 스와 놈이 열받쳐 기어나올 거 같지 않냐?"

타케미카즈치가 자신만만하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고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고의였다. 후츠노미타마는 근처의 나무들이 멀쩡했더라면 그 중 하나에 제 머리를 쿵쿵 두들기고 싶어졌다.
타케미카즈치는 쿠니유즈리 때 자신이 제압했던 신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뇌신이며 군신인 이답게 타고난 성정부터 호전적인데다 천신으로서의 자존심이 유독 높아, 천상의 지시에 반항했던 신들을 좋게 볼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스와묘진 타케미나카타를 향한 호승심은 좀 너무했다. 누시사마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유치해 보인다고, 후츠노미타마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름 호적수로 인정해서 그런 것이기야 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후츠노미타마는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도발을 해서 어쩌려고요?"
"녀석이 기어나오면 한 판 제대로 붙어야지. 어느 한 쪽이 박살이 날 때까지 치고받아 보자고."
"쿠니유즈리 때 이미 이기셨잖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타케미카즈치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창을 잠시 곁에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칼을 슥 뽑아 멀리 탁 트인 하늘을 겨누었다. 스와묘진의 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후츠노미타마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인간들의 말로 하자면 스트레스성 두통이리라.

"애초에 스와 놈이 치사한 거다. 군신이면 군신답게 제 땅에서 나와서 한 판 붙자니까."
"그 타케미나카타노카미에게 이 땅에서 나오지 말라고 약조를 하게 한 건 누시사마입니다."

후츠노미타마의 지적은 타케미카즈치에겐 안 닿은 듯했다. 멧돼지를 옮겨놓고 돌아온 백록들을 격려하듯 가볍게 두드려주며, 아마츠카미의 군신은 도발적으로 웃었다.

"다른 신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얼굴을 보이긴커녕 사자 한 명도 안 보내는 스와 녀석도 잘 한 건 없지 않겠냐?"
"……."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건 없지만서도. 후츠노미타마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팔을 잠시 축 늘어뜨렸다. 스와묘진의 궁에서는 지금쯤 짜증을 팍팍 내는 제신을 그 가신이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지 않을까. 천리안을 얻은 듯 안 봐도 훤히 그 모습이 신검의 머릿속에 떠올라 그려졌다. 여기나 거기나 결국 똑같다는 생각에 후츠노미타마는 더 이상 지적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전쟁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하세요. 그래서 앞으로 몇 마리나 더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여기서 저기 저 능선까지 다 뒤집어볼까 생각 중인데."
"명백히 목적이 사냥이 아니게 됐잖아요."

후츠노미타마가 짐짓 노려보는 것을 어깨를 으쓱여 넘긴 타케미카즈치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는 창을 뽑아 다시 사냥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후츠노미타마는 제 주인을 따라가는 흰 사슴들에게 넌저시 귀띔했다.

"어려운 건 알겠지만, 적당히 해 두십시오. 뒷처리가 무척 골치아플 것 같으니."

백록들의 시선이 유달리 안쓰러워 보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시마의 무용 드높은 군신은 다시금 몇몇 흰 사슴들과 함께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