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지명/인명/단체 등과 관련이 없는 가상 세계관 기반 글입니다
"요시가 보고 싶어…"
일본 전국의 신들이 모이는 이즈모 회합. 각 지방의 수많은 신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인간의 연을 맺어주며 회포를 푸는 신성한 연례행사. 그 주연이 한껏 열리는 10월의 어느 밤, 술자리 한구석에서 한 신이 쭈그리고 누워 오열하고 있었다. 아름다은 옅은 금색 머리카락이 옆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과 섞인 모양이 꼭 술병에서 술이 쏟아져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정화를 담당하는 직책만큼이나 곱고 깨끗한 빛깔을 띤 흰 예복이 구겨지는 것조차 개의치 않은 채 흐느끼는 신의 모습에, 곁에 있던 다른 정화신 두엇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름쯤 지나면 다시 볼 수 있잖나."
"지금 당장 보고 싶어…"
"그렇게 운다고 그 인간을 당장 여기로 날라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좀 일어나서 의관을 가다듬으세요. 스쿠나미신(스쿠나히코나)이나 나오비노카미께서 오시면 어쩌려고요."
작달막한 키의 다른 지방 정화신이 쩔쩔매며, 엎어져 우는 이를 연신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어서기는커녕 더욱 새우잠을 자는 듯한 자세로 웅크려버렸다. 몸을 데굴 굴려 제 동료 신들 쪽을 보고 누운 모습은, 그 품에 코소데(의복의 일종)를 하나 꼭 끌어안고 있었다. 눈화장을 한 건지 울어서 부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붉어진 눈시울에, 부채를 부치던 다른 정화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에카나야마 자네 취했네."
"취하면 요시가 혼내는데… 요시가 혼내는 말 듣고 싶어……."
"대신에 내가 나무라는 소리는 얼마든지 들려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하고, 정중하고, 무척이나 날카로운 그 목소리는 마치 의식에 쓰는 화살, 혹은 양날검과 같았다. 한겨울에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같은 목소리에, 바닥에 옆으로 누워 훌쩍이는 이를 제외한 다른 두 신이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카미나오비노카미시여, 격조했습니다."
"1년 만이군요. 다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잘 지내는 듯하여 안심했습니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야에카나야마노미코토, 당신은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입니다만."
카미나오비는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안경알 너머로 비치는 가느다란 눈이 차갑게 빛나자, 다른 두 신이 제각기 이젠 큰일났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신 야에카나야마는 그제서야 눈물 범벅인 눈을 훔치며 제 상반신을 바닥에서 일으켰다. 여전히 한손으로는 누군가의 코소데를 꼭 끌어안은 채, 야에카나야마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제 앞머리를 다른 손으로 빗어 한쪽 눈을 가렸다.
"카미나오비님, 안녕하셨습니까."
"방금 전까지는 안녕했습니다만 당신의 그 모습을 보고 그렇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습니까?"
곁에 있던 다른 신들을 둘러보며 카미나오비가 이야기했다. 둘은 잠시 제 동료 신에게 딱하다는 눈빛을 보낸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비노카미 형제의 설교가 얼마나 매서운지는 정화신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말이 상대적으로 유한 형 카미나오비 쪽에 걸린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그렇게 저들끼리 이야기하며, 두 신은 다른 이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술상 쪽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다른 술상에 섞여들어간 것을 확인한 카미나오비는 아까 전까지 엎어져 울던 신을 돌아보았다. 어찌어찌 머리를 다듬은 야에카나야마는, 하지만 아직도 머리로 가리지 않은 눈가에 눈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미나오비는 다시 안경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했다.
"신성한 회합에서 무슨 행동거지입니까. 이즈모대신(오오쿠니누시)께서 주최하시고 아마테라스 대신께서도 걸음하시는 자리임을 잊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야에카나야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늘 느긋하고 유들유들하게 만사를 살아가는 그였지만, 정화신들 중 최고위의 반열에 드는 나오비노카미의 앞에서는 역시 어느 정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더더욱. 야에카나야마는 품에 안고 있던 코소데에 하관을 폭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본 카미나오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 어디선가 꺼낸 샤쿠(홀)로 바닥의 술병들을 전부 밀어내며 말했다.
"이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나무랄 겁니다. 나도, 오오나오비도. 그리고 당신의 저택에 있는 그 인간 아이도."
"요시가아……."
"다시 시작할 생각은 마십시오."
카미나오비가 쥘부채를 쥐듯이 샤쿠를 쥐고 야에카나야마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야에카나야마는 훌쩍임을 삼키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옷자락까지 가다듬고 비로소 똑바로 정좌한 그는, 품에 줄곧 안고 있던 코소데를 곱게 정리하고 두어 번 접어 다시 꼭 안았다. 방금 전까지는 상위 신격의 신에게 혼나느라 울상이었던 얼굴이, 발그레하니 상기된 기쁜 얼굴로, 그리고 다시 쓸쓸함에 울먹이는 얼굴로 변했다. 카미나오비는 샤쿠를 거두고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 옷은 이번에도 그 인간 아이의 것입니까?"
"네! 여기 올 때 요시에게 받았습니다. 요시는 정말 좋은 아이에요~ 나 쓸쓸해한다고 이렇게 자기 겉옷도 주고."
떨어지기 싫다고 엉엉 우는 걸 달래려고 준 것이겠지. 보지 않아도 카미나오비의 머릿속에 그 풍경이 절로 그려졌다. 20년쯤 전 야에카나야마의 저택에 들렀을 때 저택 문 너머로 보았던 적이 있었다. 이즈모 회합에 꼭 가야 할까 하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던 야에카나야마 주위에서 쩔쩔매던 부하 꿩들, 그리고 적당히 하시라며 그 이마를 꾹꾹 눌러 밀어내던 검은 단발의 여성.
"요시…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야에카나야마는 코소데를 인형처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한쪽 눈이 맑게 일렁였다. 그 목소리는 정말로 애타는 듯해, 마치 제 반쪽을 찾아 구슬피 우는 새와도 같았다. 그 모습은 카미나오비에게는 당황스럽다 못해 신기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해맑게, 하지만 뜬구름처럼 표표히 이 자리 저 자리를 흘러다니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던 정화신이, 지금은 인간 아이 하나에 이토록 목을 매면서 애달프게 울고 있다니. 술을 마시는 건 똑같지만.
"그 아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네~"
"일전부터 궁금했습니다. 대답하십시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카미나오비의 목소리는, 자신보다 하위의 신에게도 존대를 쓰는 정중함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저의는 오늘 중에 한 말 중 제일 날카롭게 날이 벼려져 있었다. 힐난하는 회초리가 아닌, 조사하려 찌르는 지팡이에 가까운 느낌을 품고 있었다.
야에카나야마는 코소데에 반쯤 묻고 있던 얼굴을 완전히 들어, 자신이 따르는 고위 신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흔들려, 줄곧 가리고 있던 한쪽 얼굴을 잠시 드러냈다가 도로 감추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잠시 드러났던 한쪽 눈꺼풀 속에는, 안구 대신 검은빛을 품은 수정이 있었다. 그것이 황천의 풍경을 비추는 물건이며, 야에카나야마가 단지 한 인간을 지상에 두기 위해 황천에 내기 담보로 내놓은 한쪽 눈을 대신한 것이라는 사실은 카미나오비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때 제 동생이며 역시 정화신들의 최고위에 있는 신 오오나오비가 얼마나 화를 내고 머리를 감싸쥐었는지도 역시 눈에 선했다.
야에카나야마는 아직 멀쩡한 다른 한쪽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잠시 후, 그는 술을 마셨음에도 유독 또렷한 목소리로, 밝게 이야기했다.
"요시가 사랑스러워서요."
그렇게 말하고 야에카나야마는 웃었다. 여전히 술기운과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마음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목소리로, 얼굴에 발그레하고 환한 웃음을 띄운 채.
그는 정말 그뿐이었다. 후손을 아끼는 선조의 마음인지, 미래의 반려를 그리는 연인의 마음인지, 그는 그런 구분 자체를 애초에 짓고 있지 않았다. 여러 신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우는 것도, 황천에 내려가 제 한쪽 눈을 내놓는 것도, 요시라는 이름의 인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런 것뿐이었다.
카미나오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사랑법은, 신이 보아도 지극히 신령의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야에카나야마의 저택에 갔을 때 그 인간 여성… 요시라는 이에게 따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아무리 무겁게 마음을 표현한다 해도, 선조님의 마음에 비하면 가벼울 겁니다」
"…아까 전처럼 인사불성이 되는 일만은 삼가도록 하십시오. 회합이 끝나려면 아직 보름이 남았으니 그것도 잊지 말고."
고위의 정화신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다른 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등 뒤로, 사랑에 푹 빠진 정화신이 일어서서는, 다시금 인간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술을 가지러 한쪽으로 하늘하늘 걸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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