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은 무척이나 조용해서, 머리를 빗어내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키리히메는 거울을 보며 늘어뜨린 머리 중 긴 쪽부터 조용히 빗어나갔다. 곧 잠들 건데 머리를 단장해서 무엇 하겠냐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편이 마음이 훨씬 나아지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참빗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하얀 머리카락이 눈이 쌓이는 듯한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안에 있나?"
갑자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키리히메는 빗질을 멈추고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과 함께 키 큰 사람 그림자가 창호지문에 비쳤다. 잠시 바라보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재차 물어왔다.
"뭐야, 벌써 자는 건가? 안에 불 켜져 있다만?"
"아직 일어나 있어. 들어와도 괜찮아, 니혼고."
키리히메는 문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문이 드르륵 한쪽으로 밀리고, 예상했던 얼굴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니혼고는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이 아닌 낙낙한 전통복을 입고 있었다. 배색이며 무늬는 비슷하지만 조형이 확연히 달랐다. 키리히메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일전에 창들과 나기나타가 쓰는 방에 이불을 수선하러 갔을 때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니혼고는 평소에는 움직이기 편한 현대식 복장을 입고 다녔지만, 밖에 나갈 일이 없거나 하면 전통복을 입는 일도 가끔 있었다. 가슴팍을 다 드러내듯이 입고 다니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평소 복장부터 문제가 있는 남사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니만큼 넘어갈 수 있었다.
"밤중에 무슨 일이야? 뭔가 급한 일이라도?"
"누가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이 밤중에 일 얘기 하러 왔겠냐. 술이라도 마시러 온 거다."
그렇게 말하며 니혼고는 한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올렸다. 평소 차고 다니는 회색 술병보다 더 작고 색이 달랐다. 새로 사 온 것이겠거니 하며 키리히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술은 지로타치나 후도와 마시는 게 더 낫지 않아? 나, 술은 약한데."
"따라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냐. 지금은 술꾼 동지보다 신부와 같이 마시고 싶은 기분이고."
"신부라니."
또 이 말이구나, 하고 키리히메는 입을 가렸다. 요사이 니혼고는 유독 결혼에 관련된 화제를 입에 즐겨 담고 있었다. 마음이 통한 사람과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걸까 하고 그녀는 홀로 해석해 납득하고 있었다.
"따라주는 정도면. 새 술 사 온 거야?"
"뭐, 괜찮은 녀석이 손에 들어와서 말이다. 잔도 가져왔으니까 한 잔 부탁한다.
뽀얀 빛깔의 잔을 꺼내며 니혼고가 자리에 앉았다. 그가 술 마개를 열자 특유의 냄새가 아른아른 떠올랐다. 몸이 살짝 떠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키리히메는 술병을 건네받았다.
안주도 없는데 니혼고는 몇 잔째 술술 받아넘기고 있었다. 세 잔째부터는 쿠로다부시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꽤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하며 키리히메는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렇게 맛있어?"
"꽤 좋은 술을 손에 넣었거든. 따라주는 손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맛이 꽤 변하지만 말이다."
"술 못하는 사람이랑 대작하고 있으면 지루할 텐데."
"말했잖냐, 지금은 술꾼 동지랑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고. 그렇지, 너도 한 잔 정도는 마셔볼 테냐? 강요하는 건 아니다만."
빈 잔을 바닥에 내려놓은 니혼고의 표정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키리히메는 제 손에 들린 술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술이 약하긴 해도 한두 잔도 못 마시는 수준은 아니니,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 퍼진 술향기에 마음이 취하기 시작했나 보다 하고 속으로 웃으며, 그녀는 술병을 내려놓고 잔을 집었다.
"그럼 한 잔만. 부탁해."
"오, 좋지. 정 3위가 직접 술을 따라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영광이지 않냐."
목을 울려 웃으며 니혼고가 술을 거의 한계까지 따라 주었다. 살짝 붉은 빛이 감도는 술은 이국의 포도주를 연상시켰지만 그보다는 훨씬 맑았다. 잔을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뭔지 모를 과일 향기가 났다. 키리히메는 입술을 살짝 적신 후, 그대로 천천히 들이켰다. 술 특유의 화끈거리는 느낌은 생각보다 덜했다.
키리히메는 빈 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입을 훔쳤다. 니혼고가 마시는 것치고는 꽤 약한 술이구나 하고 조용히 생각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와 닿는 강렬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니혼고? 뭔가 할 말이라도...?"
"잔, 다 비웠군. 그거, 사실은 좀 특별한 술이다."
니혼고의 손이 키리히메의 볼을 감쌌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키리히메였지만 목덜미 쪽에 긴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니혼고의 눈빛이 어쩐지 붉게 변한 것 같았다.
"특별한 술?"
"그래. 그거, 사실은 좀 특이한 신주(神酒)라서 말이다. 그걸 신에게 건네받아 마셨으니, 이제 넌 그 신에게 시집와야 된다."
"그런 거야?!"
키리히메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잔이 슬며시 웃는 것 같았다.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니혼고의 손끝이 유독 뜨거웠다. 술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점점 키리히메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이 나뭇잎이 내려앉은 수면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던 니혼고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다. 그냥 좀 맛이 괜찮은 술일 뿐이야. 이번에 새로 담근 거라면서 오니들이 팔고 있더군."
키리히메의 귀를 가볍게 잡는 손길이 장난스러웠다. 키리히메의 얼굴에 발그레하니 혈색이 강해졌다.
"놀린 거야?"
"설마 진짜로 믿으리라고는. 그렇게 덥석덥석 믿으면 안 좋다고?"
"니혼고가 그런 표정으로 말하는 거라 거짓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키리히메는 두 옷소매로 얼굴을 폭 가렸다.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니혼고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그런 게 있으면 기꺼이 써 주겠지만."
"어?"
"너는 평소에는 무방비한데, 묘하게 결혼 승낙은 잘 안 해주니 말이다."
키들키들 웃으며 니혼고는 제 주인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술의 향기와 혀의 감촉으로 입 안에 표식을 남기려는 듯한 깊은 입맞춤에 키리히메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