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밤, 사니와 키리히메는 악몽을 꾸었다.
이불 밖으로 굴러떨어진 키리히메는 숨을 고르며 바닥을 더듬었다. 차가운 다다미의 결이 냉기와 함께 손가락을 파고들자 그제야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이마에 손을 얹으며 올려다본 어두운 천장이 마치 자신을 향해 무너져내릴 것 같아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빙빙 도는 머리를 잠시 꾹 누른 후 키리히메는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가슴 위로 흘뿌려지듯 흔들렸다. 비척비척 마르는 입술을 무의식중에 손으로 더듬으며 그녀는 옷장을 향해 다가갔다.
50명이 넘는 이들이 거주하는 대저택이지만 한밤중에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버선발인데도 발소리가 울리고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키리히메는 정원을 향해 나아갔다.
밤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달빛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별무리가 산산조각이 나 흩뿌려져 있었고, 그 빛들은 이따금 귓가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일렁였다. 이 시대에는 웬만하면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렵다고 다른 사니와들에게 들었는데 신기한 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키리히메는 가만히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날씨가 흐리지 않는 것에 그녀는 조용히 감사했다.
문득 바람이 다시 불어와 키리히메는 네마키 위에 걸친 외투를 여몄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거의 실려있지 않았다.
"츠루마루 공, 경비를 설 때에는 출진할 때의 복장을 갖추는 것이..... 주군?"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키리히메는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곳에서 그 모습이 빠르게 또렷해졌다. 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키리히메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톤보키리?"
"주군?! 죄송합니다, 멀리서 머리색만 보고 츠루마루 공과 혼동했습니다."
자신의 착각을 탓하듯 톤보키리는 헛기침을 했다. 키리히메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무언가 긴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거기서 키리히메의 말이 끊겼다. 그녀의 시선이 톤보키리의 한쪽 손, 정확히는 그 손이 들고 있는 무기에 맞춰졌다. 키리히메는 하려던 말의 나머지 부분과 나오려던 숨소리를 동시에 삼켰다.
한동안 주인이 말이 없자 톤보키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군,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톤보키리가 재차 말을 걸었지만 키리히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밤이 너무 깊었다.
바람소리 외에는 고요한 순간이 흘렀다. 톤보키리는 주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지금껏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 비스무리한 것을 끌어내렸다.
"날이 차다고 하여 다른 이들에게 추천받은 방한구입니다. 그 차림으로 밤중에 오래 밖에 서 계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톤보키리는 키리히메의 어깨에 담요 덮듯 방한구를 둘러주었다. 상반신을 누르는 천의 묵직한 무게에 키리히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 천을 둘러준 남사를 올려다보았다. 화롯불 색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평소 이상으로 따뜻해 보였다.
"주군?! 정신 차려 주십시오!"
톤보키리가 갑자기 허둥거렸다. 그제서야 키리히메는 자신이 주저앉은 것을 눈치챘다. 싸늘한 목재 위에 부딪힌 무릎이 한 박자 늦게 얼얼해졌다. 키리히메는 몸을 바르르 떨며, 어깨를 덮고 있는 톤보키리의 방한구를 꼭 붙잡았다.
"편찮으신 곳이라도? 상비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의술에 소양이 있는 이가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
"몸이 아픈 건 아니야."
키리히메는 톤보키리의 팔 갑주를 붙잡았다. 그 손길에 톤보키리가 눈을 크게 뜨고 멈칫했다. 반론하고 싶은 것인지 재차 묻고 싶은 것인지 모를 눈빛을 애써 흘려넘기며 키리히메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서 잠깐 불안했던 것뿐이야. 놀래켜서 미안해."
"악몽을 꾸신 것입니까, 그건 좋지 않군요.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 말하며 톤보키리는 키리히메가 자세를 고쳐 앉게 했다. 마루에 앉은 키리히메는 입김을 토하며 기둥에 기댔다가 바로 몸을 뗐다.
"힘드시면 계속 기대고 있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고마워."
남사에게 돌려준 키리히메의 웃음은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긍정적 감정을 그러모아 간신히 그린 것이었다. 입꼬리가 살살 떨리고 있는 탓에 그것을 눈치챈 톤보키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뿐, 그는 아무 말 없이 주인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가쁜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고도 조금 더 지났을까, 키리히메가 톤보키리를 올려다보았다.
"묻지 않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저으며 키리히메는 몸을 웅크렸다. 체격차가 있어서 톤보키리의 방한구는 키리히메에게는 거의 무릎담요 수준이었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자 상반신 전체가 방한구에 폭 잠겨들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톤보키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악몽에 대해 굳이 제가 들춰 주군의 좋지 못한 기억이 뚜렷해지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주군께서 이야기하길 원하신다면 듣겠습니다."
"그렇네. 사실 잊어버리는 게 제일인데."
하지만 잊을 수 없다는 것은 키리히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악몽이 단순한 꿈 속 일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겪었던 일인 한, 키리히메는 평생 그 꿈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옷깃 틈새로 감추었다.
"예전 꿈을 꿨어."
"예전 꿈....... 그건."
"응. 꿈인데도 아팠어. 가슴 속이 부서져서 소리도 지를 수 없었어. 그리고는 차가워졌어. 몸속으로 싸늘하게 밀려들어왔어."
키리히메의 말은 중구난방이었지만, 톤보키리는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의 주인은 일찍이 창에 찔리고 강물에 던져진 적이 있었다. 그는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본체를 내려놓아 마루 아래로 숨겼다.
"돌아가셨을 때의 꿈입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는 사니와의 얼굴에서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톤보키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었겠다, 아팠겠다는 말조차 그는 꺼낼 수 없었다. 섣불리 말하는 것이 제 주인을 얼마나 상처입힐지 그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침묵을 지킨 후, 그는 조용히 주인의 손을 잡았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주군께는 타인의 온기가 필요하실 듯하여."
"톤보키리......."
"주군, 저는 무장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저는 창입니다. 주군의 몸을 꿰뚫었던 것과 같은 무기입니다."
낮게 울리는 그 말은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못이 일렁이는 듯했다. 키리히메는 자신의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본디 무기는 살을 찢고 뼈를 부술 수는 있어도 그 때 얼마나 아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모습으로 현현한 지금에 와서야 겨우 이 몸으로 부상을 체험할 뿐입니다."
"......."
"그런 저로서는 겨우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척 아프셨을 테지요."
그 한 마디에 키리히메는 몸을 떨었다. 가슴 한켠에서 뭔가가 떨어져내리는 듯한 느낌이 그녀를 치고 지나갔다.
키리히메는 톤보키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갑주 낀 손으로 훑어올렸다. 검은빛 장갑 위로 흰 머리칼이 나부끼고, 화톳불을 닮은 눈빛이 따스하게 일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키리히메는 톤보키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근육 잡힌 단단한 팔을 갑주째 끌어안았다.
갑자기 잡아끌려졌건만 톤보키리는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어 키리히메가 붙잡고 있기 좋게 자세를 낮춰주었다.
'차라리 우시면 편할 것을.'
팔에 매달린 키리히메는 떨고 있었지만 흐느낌 비슷한 것은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톤보키리는 한숨을 내쉬며 그런 주인의 어깨를 방한구 위로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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