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하세베가 당고 접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마루에 앉아 눈이 희끗희끗 남은 정원을 바라보던 사니와 키리히메가 그를 돌아보았다. 색채가 없던 밋밋한 얼굴에 살짝 호선이 패였다.
"조금."
"제가 할 수 는 없는 일입니까? 가신의 처벌이든 적의 도륙이든 전부 해내 보이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담담히 고하는 하세베의 목소리에는 기백이 들어가 있었다. 당고 꼬치를 집어들던 키리히메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쪽도 지금은 괜찮아."
"그럼 이후의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말해 주시길."
"하세베도 참."
헛웃음을 흘리며 키리히메는 당고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느릿느릿 분홍빛 알을 씹으며 그녀는 바닥을 응시했다. 청소 당번들이 깔끔하게 쓸어놓아 맨땅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흰 발자국들이 눈을 흩뿌려 놓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키리히메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내렸다.
하세베는 그런 주인을 무릎을 꿇고 앉아 지켜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게 내버려둔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까?"
키리히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을 의미하는 것임을 하세베는 알고 있었다. 그는 혀를 차려던 것을 삼키며 주인에게 고했다.
"주군께 버거운 명령이라면 제가 대신 수행하겠습니다. 주명을 내려 주십시오."
"아니, 괜찮아.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야 하고."
마지막 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두 번째 당고 알을 입에 넣은 키리히메는 이번에는 그것을 씹지 않고 입 안에서 천천히 돌돌 굴렸다.
하세베는 소리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주인은 정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입장이었다. 정부 소속의 인물인 사니와가 정부의 명령을 듣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의 주인에게는 유독 거부권이 없었다. 설령 그녀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의 주인은 그것을 말없이 따르리라. 주명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하세베에게도 그것은 너무한 처사로 보였다.
"하세베는 변함없이 상냥하네."
문득 들리는 말에 하세베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당고를 삼킨 키리히메가 은은한 미소를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응. 가끔 무서운 말을 하기는 해도, 언제나 잘해 주고... 덕분에 언제나 도움받고 있어."
살며시 볼을 붉히며 키리히메는 하세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어깨를 두어 번 쓰다듬으며 그녀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었다.
하세베의 홍채가 흔들렸다. 주인에게서 나는 옅은 향 냄새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사니와의 눈꺼풀을 시선으로 쓰다듬던 그는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도 키리히메는 생글거렸다. 겨울의 끝을 고하는 봄 아지랑이 같은 웃음이었다.
하세베는 흘끗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손을 거두며 가볍게 숨을 토하는 것을 바라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주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키리히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이 해바라기라도 하자고 청할 셈이었을 테지. 그것을 짐작하면서도 하세베는 짐짓 모른 척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예, 잠시 중한 용무가 있기에. 곧 돌아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하세베 몫, 남겨둘게."
대답과 함께 키리히메는 접시에 남아있는 당고 꼬치들의 산 한가운데에 골짜기를 만들었다. 하세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 자리를 떠났다.
***
차가운 칼날이 나무로 된 창고 바닥에 꽂혔다. 칼의 주인은 숨을 뱉듯 토하며 바닥에 박힌 카타나의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순순히 협력하는 게 좋을 거다, 쿠다기츠네."
"콘노스케입니다! 도검남사,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작은 여우가 캥캥 짖었다. 발치에서 와들거리는 그것을 무정히 내려다본 하세베는 칼을 바닥에서 뽑더니 그 날카로운 끝을 여우의 미간에 눌렀다. 콘노스케가 힉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요괴건 식신이건 간에 베이면 죽는 건 똑같을 테지."
"이런 짓을 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주인이 이런 일을 시켰을 리는 없어, 독단적인 행동이지요?"
"네놈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놈이 지금 해도 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칼끝을 누르며 쏟아진 하세베의 말은 한겨울 공기에 식은 도신보다도 차가웠다. 콘노스케는 뒤로 물러섰지만 칼끝이 그를 쫓아왔다.
여우는 남사를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하세베의 얼굴에는 냉소조차도 뜨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찰의 문간에 있는 금강력사 같았다.
한동안 차가운 공기가 흐른 후, 콘노스케가 꼬리에서 힘을 뺐다.
"나 역시 명을 전달하는 입장, 당신의 주인의 이름을 직접 알려주는 행위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럴 테지. 나도 네게 주군의 이름을 직접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협력해라."
콘노스케는 몸을 부들거렸지만 고개를 젓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자신의 주군과 같은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켠이 뒤틀리는 하세베였다. 그러나 그는 일단 칼을 거두었다.
칼날이 딸깍 소리를 내며 칼집 속으로 전부 들어갔다. 그제야 그를 지나쳐 창고 입구로 뛰어나간 콘노스케는 나가려다 말고 하세베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사를 바라보며 콘노스케가 그르렁거렸다.
"헤시키리 하세베. 과연 마왕의 소유였던 자, 어디까지고 잔학무도해질 수 있는 칼이군요."
"나는 주군의 검이다. 전 주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콘노스케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어느새 멀리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하세베는 창고 입구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쿠다기츠네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말은 사실이라고 그는 조용히 통감했다.
'주군께서는 이 모습을 보실 일이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약한 여우 한 마리를 괴롭히는 철없고 잔인한 남사. 실상은 정부의 수하에 칼을 겨눈 츠쿠모가미 한 자루. 어느 쪽이든 하세베는 그 모습을 결코 자신의 주인에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키리히메는 하세베를 상냥하다고 말했다. 가면을 철썩같이 진짜 얼굴이라고 믿어주고 계셔 다행이라고 하세베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제일이 되기 위해서라면.'
가면 속에 본성을 숨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언제 자신의 본모습을 들킬지 몰라 조마조마해해야 하는 위기감도 기꺼이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세베는 창고를 뒤로 했다.
여우의 발자국이 키리히메가 있는 마루와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금 웃는 얼굴을 뒤집어쓰고 마루로 향했다.
'구 연성(200101 이전) > 구 도검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重傷 【타누사니】 (0) | 2016.11.08 |
---|---|
위로 【톤보사니】 (0) | 2016.11.08 |
後 【타누사니】 (0) | 2016.11.08 |
後 【니혼사니】 (0) | 2016.11.08 |
독점욕 【헤시사니】 (0) | 201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