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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그런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는 걸 들었어요. 가장 사랑하는 1명과 그 한 명을 제외한 100명 중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냐고."
천상에 지어진 깨끗하고 넓은 저택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향나무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신비한 성역에는 어울리는 화제이기도 했고, 어울리지 않는 화제이기도 했다. 오늘 저택을 찾은 정화신들 중 가장 어린 1주柱가 물어온 소재에, 다른 이들 몇몇이 귀를 쫑긋 세웠다. 과자 상자를 들고 들어왔던 옅은 금발의 신이 방글방글 웃으며 그 이야기를 물었다.
"인간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니?"
"네. 제게 물은 건 아니고 저들끼리 주고받던 거지만요."
"특이한 질문이네. 그래도 생각해볼 만한 주제야."
흰색 무명천을 한쪽에 내려놓은 다른 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에 들어왔다. 지필묵을 가지러 나가려던 두 신이 발걸음을 사뿐 돌려 끼어들었고, 곧 이야기는 제법 왁자지껄하게 피어올랐다. 그들 중 가장 목소리가 큰 한 신이 고개를 들어 상석 쪽으로 화제를 던졌다.
"오오나오비노카미께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상석에는 길고 다소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신이 앉아 화지에 붓을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나라 시대의 조복을 연상시키는 짙은색의 고풍스러운 옷을 걸친 그는, 줄곧 좌식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신들보다 키가 훌쩍 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경을 써도 누그러지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은 질문을 던진 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조차 들지 않고 차갑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가정이 어디에 쓸모가 있지? 대답하는 이를 정서적으로 괴롭히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해요, 미코토(일본 신의 존칭). 그냥 재미로 생각하셔도 되잖아요?"
"될 것 같으냐. 신이라면 그 언령의 무게를 알아라."
오오나오비가 눈을 치켜떴다. 조금 떨어져 있던 신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시 침을 삼켰다. 과연 고위의 정화신인 나오비노카미 형제 중 한 쪽다웠다. 만일 이 저택이 법정이라면 저택의 주인인 나오비노카미 형제는 재판관이었다. 형제 중에서도 동생인 오오나오비는 형인 카미나오비보다도 언동이 엄격하여, 하위의 정화신들 사이에서는 '오오나오비와 염마(염라대왕) 중 어느 쪽이 더 매서울까'로 곧잘 이야가 오고가는 판이었다. 그런 그에게 천연덕스럽게 장난을 걸 수 있는 이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터였다. 이를테면 지금 막 찾아와 쾌활하게 말을 던지는 작달막한 소년이라거나.
"예나 지금이라 꽉 막혔다니까. 그냥 적당히 대답하면 되잖아? 큰일 날 문제도 아닌데."
"…스쿠나미카미여."
오오나오비가 크게 한숨을 쉬며 붓을 벼루에 내려놓았다. 작은 키에 깨끗하고 단출한 흰 옷을 걸친 소년이 한손을 흔들자, 그 자리의 다른 이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별을 가늠키 어려운 중성적인 소년은 아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그 인사에 답했다. 소년이 폴짝폴짝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기이한 보라색 단발이 그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그 행동거지는 신보다는 텐구 같은 느낌이 더 강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분명히 신이었다. 창조3신 중 하나인 카미무스히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지상의 건국신을 의형제로 두었으며, 정화와 약학에 신위를 둔 위대한 스쿠나미신이었다. 고위 정화신이며 나오비노카미 저택의 또다른 주인인 카미나오비를 제 수행원처럼 뒤에 거느리고 들어오는 것도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미있잖아. 상상력이라는 건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거라구."
"상상력은 보다 희망적인 방향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그건 재미없어."
딱 잘라 말하는 스쿠나미신에 몇몇 신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오오나오비는 자신의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는 콧잔등을 한손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골치아픈 일이 있을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 때 스쿠나미신을 따라 들어온 키 큰 신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는 오오나오비와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를 뒤에서 묶고 단안경을 끼고 있어, 쌍둥이임에도 첫인상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서늘한 목소리와 칼로 자른 듯한 어조는 역시 정화신 나오비노카미의 그것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단일 존재와 그를 제외한 복수의 존재 중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을 택하는가. 그것은 그렇게까지 무의미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 답을 내리는 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으음."
오오나오비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안경을 도로 썼다. 스쿠나미신이 키득키득 웃었고, 카미나오비는 거기서 아무 말도 더 얹지 않고 조용히 뒷짐을 졌다. 그 때 질문을 물어왔던 어린 정화신이 자신의 상관에게 물었다.
"그럼 카미나오비노카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에게도 묻는 것입니까? 그렇군요. 나는… 한 명보다는 여러 명을 택하겠지요."
답을 내리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들인 뜸도 너무 짧아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정도의 간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은 스쿠나미신이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냉정한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가장 사랑하는 하나만을 위해 다른 많은 자들을 버리는 것은 정화신의 본분에는 걸맞지 않는 일입니다. 한 명에게는 어떤 원망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카미나오비의 뒷문장은 아주 살짝 음색이 탁해져 있었다.
"그래? 그럼 동생 쪽은 어때?"
"형님의 의견과 같습니다."
오오나오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엄격하고 단정한 표정이었는데, 너무 단정해서 얼굴빛이 밝아 보일 지경이었다. 카미나오비의 얼굴도 그와 크게 다르진 않았으나 단안경 뒤에 가려진 눈이 아주 잠깐 괴로운 빛을 보였다가 빠르게 이를 지워버렸다.
그 때 긴 금발을 지닌 정화신이 과자 상자를 잠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스쿠나미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나도 100명 쪽."
단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스쿠나미신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좋아하는 걸 다 버리긴 아깝잖아. 난 많은 쪽으로 할래."
"스쿠나미카미여, 그 사고방식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어때. 신은 원래 너무한 거야."
카미나오비의 지적에도 스쿠나미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혀만 살짝 빼물었다. 다른 신들과 비교해도 기이한 빛을 지닌 두 눈이 한층 기이하게 빛났다.
"아, 내일은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이건 오늘 한정 대답이다?"
소년 모습을 한 오래된 신은 싱글싱글 웃으며 춤추듯 몸을 한번 휙 돌렸다. 카미나오비는 단안경을 벗어 테두리에 늘어뜨린 장식끈을 매만졌고, 오오나오비는 다시 깊게 한숨을 내뱉은 후 붓을 들었다. 스쿠나미신이 맨바닥에 털썩 앉아 크게 하품을 하자, 카미나오비가 동자를 불러 깔개를 가져오라 명했다. 다른 정화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곧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처음에 이야기를 가져왔던 어린 정화신은 가볍게 딸꾹질을 한 번 했다. 과자 상자를 들고 왔던 긴 금발머리 신이 그에게 작은 화과자 한 개를 나누어주었다.
"감사해요, 야에카나야마님."
어린 정화신이 깍듯이 인사하자 야에카나야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방글방글 웃었다.
"그런 이야기가 오늘 있었단다."
야에카나야마, 즉 야에님은 생글생글 웃으며 제 곁에 앉은 여인에게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주었다. 무화과 여럿이 담긴 쟁반을 사이에 두고 앉은 여인은 그런가요, 라고 짧게 대답하며 무화과를 집어들었다. 야에님과 닮은 곳이라고는 창백한 피부 외에는 별로 없는 이 검은 단발의 여인은, 인간이라고는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택 안에서 제일 발언권이 센 존재였다. 저택의 주인인 야에님이 명실공히 푹 빠져있는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야에님은 제 후손이자 동거인의 무심한 대답에도 여전히 녹을 듯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요시라면 그 둘 중 어느 쪽을 고르겠니?"
"꼭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그 질문."
요시는 무화과를 베어물고 남은 꼭지를 내려놓으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에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그저 물색없이 웃어보였다. 요시는 한숨을 쉬었다. 야에님은 딱히 대답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요시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고, 요시의 생각을 더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요시는 다음 과일을 손에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원을 다니던 꿩들 중 한 마리가 멀리 날아올라 하늘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생각한 후, 요시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인수가 많은 쪽을 택하겠지요. 한 사람의 원한보다 백 사람의 원한 쪽이 무서우니까요."
"그런 이유니?"
"예, 그런 이유에요."
요시는 부드러운 과일을 깨물었다.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킨 후, 인간 여인은 말을 맺었다.
"저주사니까요."
그 눈은 자신이 깨문 과일의 남은 단면을 보고 있었다. 더욱 정확히는 야에님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쑥쓰러워하는 것일까, 혹은 자신의 말을 들은 야에님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무화과를 쥔 요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야에님은 맑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목소리는 평소 요시를 대할 때처럼 둥실 들떠 있었다.
"좋은 말이야."
"미코토, 그냥 제가 한 말이라서 그러는 거죠?"
"응."
야에님은 시원스레 긍정했다. 요시는 제 먼 선조 되는 신에게 눈을 흘겼다. 이 신은 대체 머릿속에 뭐가 있는 것일까? 답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해서 더욱 머리가 아팠다. 한 번 더 무화과의 남은 단면을 바라본 후, 요시는 야에님에게 말을 던졌다.
"답은 알 거 같지만 일단 물어볼게요. 선조님은 어느 쪽을 택하실 건가요?"
"우리 요시가 있는 쪽."
언제나처럼 들떠 맑은, 오월비나 아침안개 같은 목소리였다. 요시는 남은 과일을 물려다 말고 그 얼굴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웃는 얼굴이 마치 자로 재어 그린 것처럼 보였다.
"저 한 명을 구하자고 100명을 버리기라도 할 건가요?"
"그치만 요시가 없으면 너무 슬픈걸."
티없이 맑은 얼굴로 야에님은 웃었다. 그 앞머리는 한쪽이 유난히 길게 내려와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심연이 보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메꾸고 있는 황천의 수정에 요시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이자나미신께서 주재하시는 죽은 자의 세계를 비추는 돌. 인간 아이 하나의 수명을 잡아놓자고 기꺼이 담보로 내놓아버린 눈을 대신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선조님은 정말 정화신이 맞나요?"
진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대체 자신의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매달린단 말인가? 요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은 평생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걸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집착이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사랑이라기엔 너무 무거운 이것을 대체 무어라 하면.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현기증이 일어 요시는 이마를 짚었다.
"그런 모양이야."
야에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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