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히메는 한참을 손에 든 붓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백지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쓰려다 이내 내려놓기를 여러 번, 한 번은 몇 줄인가를 써내려가다 종이를 싹 밀어버리고 새 것을 꺼내들기도 했다. 벌써 세 번째 종이가 등판했을 때, 옆에 서 있던 톤보키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주군,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고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영 좋은 문장이 떠오르지를 않아서.”
공부 좀 더 해 둘 걸 그랬나봐, 라고 자조하며 키리히메는 붓을 벼루 위에 걸쳐놓았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두 팔을 쭉 뻗자 어깨에서 둔하게 삐걱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문이라도 쓰고 계신 것입니까?”
“후후, 비슷하지만 아니야. 이건 나카한테 보내는 편지.”
그렇게 말하며 키리히메는 붓을 들었다. 대화를 주고받던 중 뭔가 생각난 것인지, 그녀는 종이 위에 글을 슥슥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톤보키리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비젠 국에서 한 소녀가 찾아왔던 것이었다. 톤보키리는 그 날은 근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흘끗 본 정도였지만, 키리히메는 분명히 그 소녀를 ‘나카’라고 부르며 즐겁게 한참 담소를 나누었었다. 도검남사를 거느리고 왔었기 때문에 그 손님 역시 사니와라는 것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분께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응. 나도 건너건너 들은 소식이지만, 나카가 혼약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야.”
“혼인 말입니까? 좋은 일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축하하는 글을 써서 선물과 함께 보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글을 쓰는 게 좀 긴장이 되네. 아무튼 저쪽 신랑은 그 카센 씨니까.”
끼꾹. 톤보키리는 딸꾹질을 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하마터면 한손으로 들고 있던 자신의 본체를 놓쳐 떨어뜨릴 뻔했다. 키리히메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아?”
“부끄럽습니다, 이런 실수를. 그것보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 나카라는 분은 사니와이지 않으신지요?”
“응. 사니와야.”
“그런데 그 혼마루의 카센 공과 혼약을 맺는 것입니까?”
톤보키리의 말투는 침착했지만 목소리의 음색에 당황한 기색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키리히메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톤보키리는 너무 성실한 나머지 가끔 고지식한 면을 보이고는 했는데, 요사이 들어 그런 모습이 귀엽게 보일 때가 많았다. 이건 당분간 본인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키리히메는 조용히 다짐했다.
“안 된다는 법도는 없으니까.”
“그,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익숙치 못한 이야기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바로잡는 톤보키리의 얼굴에 홍조가 돋아 있었다. 이런 화제나 상황이 어지간히도 익숙치 않았나 보다 하고 키리히메는 생각했다.
“확실히 나카가 그쪽의 카센 씨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때에는 나도 놀랐었어. 사이가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느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는 모르나, 만약 카센 공 쪽에서 한 이야기였다면 상당한 결심을 바탕으로 꺼낸 이야기였을 겁니다. 주인에게 청혼이라니, 대담하군요.”
“톤보키리는 그런 쪽에는 관심 없어?”
“제, 제가 어찌 감히…! 아니, 죄송합니다, 다른 뜻이 아니옵고, 그……”
거기서 그는 할 말을 찾느라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며 키리히메는 다시 붓을 들었다. 톤보키리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 진짜로 성대하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사니와가 편지를 끝맺을 때까지 집무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톤보키리는 제 본체에 휘감긴 천 장식을 괜히 만지작거렸고, 키리히메는 붓을 이따금 벼루 위에 두드리다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 글을 끝맺는 신호로 키리히메가 한숨을 후 내쉬자 겨우 방 안의 공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포목점에서 도착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혹시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요?”
“응. 나카한테 보낼 선물이야.”
키리히메는 책상 곁에 놓인 큰 꾸러미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은 말끔히 포장되어 있지만 아침에는 분명 새하얀 고급 옷감 몇 필이었다. 집무실로 들고 오면서 ‘몸치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주군께서 무슨 일이실까’ 하고 혼자 궁금해했던 것이 톤보키리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저는 옷감에 해박하지는 못합니다만, 상당히 고급품이었던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받는 분께서도 좋아하시겠군요.”
“고마워. 시로무쿠용으로 마련한 건데, 혹시 벌써 마련했으면 어쩌지…….”
“선물이란 물건의 가치보다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니만큼 괜찮을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근시의 상냥한 말에 키리히메는 미소지었다. 조심스레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만져본 그녀는 고개를 가벼이 저었다. 아직 덜 말라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키리히메는 문득 밖을 내다보았다. 공기가 통하라고 열어놓은 문 밖으로,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소복히 덮여있는 정원이 보였다. 나카의 혼마루에 보내는 결혼 선물과 닮은 빛깔이었다.
톤보키리가 ‘눈에 좋지 않다’며 만류할 때까지, 키리히메는 계속 정원 뜰을 뒤덮고 머릿속으로 이어진 눈밭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