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독 하늘이 맑고 바람이 시원하던 어느 가을. 단 한 송이의 꽃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다녀왔어."
업무실의 미닫이문을 옆으로 미는 소리가 난 후,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펼쳐둔 서류들을 읽던 사니와 키리히메가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보았다. 오후의 청명한 햇살과 함께 들어온 남사의 옷자락이 사르락 흔들리고, 구불구불한 느낌이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 가닥이 단정한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어서 와, 카센. 사려던 건 샀어?"
"아아. 물론. 보기 좋은 문진이 들어왔기에 그것도 함께 사 왔어."
한손에 든 꾸러미를 들어 보이는 카센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것을 손에 넣은 모양이다. 풍류를 사랑하고 서화를 애호하는 남사답게, 이 혼마루의 카센 카네사다는 지필묵과 관련 도구들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좋은 붓, 윤기나는 먹 등의 고급 도구를 갖추기 위해 노력과 돈을 아끼지 않는 남사인 그는, 그러한 물건을 얻은 날은 한나절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한껏 들뜬 기운이 이쪽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키리히메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카센이 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안 되지. 너무 들떠버린 모양이야. 문과계 명도로서 늘 차분하고 우아한 몸가짐을 지켜야 하는데."
"들뜬 카센도 충분히 우아하다고 생각해."
"대단히 기쁜 일(恐悦至極)."
옛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카센은 사니와가 앉아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책 한 권을 꺼내어 책상 위에 두었다. 옷소매에 폭 가려질 정도로 작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책이었다.
"네가 찾던 시집도 찾았어. 다행히 어느 후구루마오우히(요괴의 일종)가 팔고 있었지."
"고마워, 카센."
"다 읽고 나면 나도 읽고 싶으니 얘기해 줬으면 좋겠네. 그럼 나는 이만."
고아하게 미소지은 카센은 숙였던 허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오늘 저녁 식사 전까지는 비번이었다. 키리히메도 방에 잠시 찾아왔던 남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배웅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 그에게 받은 책을 집어들려 했다.
그 때, 밖에 나가려던 카센이 문득 멈춰섰다. 무언가를 잊어버렸다가 이제 떠올랐다는 듯, 남사는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내고는 사니와의 책상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렇지, 이걸 주는 걸 잊을 뻔했어."
"응?"
키리히메가 카센을 올려다보려 했다. 그러나 눈을 마주칠 새도 주지 않고, 카센은 키리히메가 잡아들려던 시집 위에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키리히메는 멍하니 시집 표지 위를 바라봤다. 시집의 제목만 쓰여있던 단조롭고 낡은 책표지 위에, 샛노란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아직 꽃잎에 생기가 파릇파릇 넘치는, 그러면서도 부드러워 색이 녹진하게 흘러 고인 듯한 환한 한 송이였다.
"꽃…?"
키리히메는 꽃을 들어올렸다.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 향기에 잠시 미소지은 사니와는 곧 갑작스레 선물받은 작은 꽃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화사하고, 색이 곱고, 향이 매혹적인 꽃이었다. 그야말로 가을을 작게 담아 졸여낸 듯한 꽃은 단 한 송이만 있어도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그 꽃이 어디에서 온 어떤 종인지, 키리히메는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본 적 없는 식물이었던 것이다.
거리에는 꽃가게가 있으니 거기에서 사 온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꽃에 포장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들판에 핀 현세의 꽃을 꺾어온 것일까. 키리히메는 꽃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사니와는 고개를 느릿느릿 가로저었다.
만일 다른 남사가 준 꽃이었다면 키리히메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그런 식으로 선물을 가져오는 이들도 드물지 않아, 당장 어제만 해도 마에다가 가을벚꽃(코스모스)을 그렇게 가져다준 바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카센 카네사다였다. 즉흥적으로 읊는 시 한 수에조차도 시기와 시간을 따지고, 방에 피우는 향 하나에도 품격을 갖추는, 그야말로 미야비(雅)를 구현화한 듯한 남사였다. 그런 그가 단지 보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꽃이나 뚝 꺾어와 가져다 줄까.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대체 뭘까."
키리히메는 고개를 한참 갸웃거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숨을 폭 내쉰 하얀 사니와는, 마침 들어온 남사에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꽃병에 물을 조금 채워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오늘의 근시인 다른 카네사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갔다 돌아오는 동안, 사니와는 내내 꽃잎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그 꽃의 이름은 ――야."
수확한 작물을 들고 혼마루에 돌아온 쿠와나 고우가 그렇게 말했다.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신묘한 발음에 키리히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꽃병에 꽂힌 노란 꽃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며 시치미를 뚝 떼었다.
"본래는 다른 나라에서 자라던 식물이야.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이 나라에 들어왔지."
"아… 그래서, 구나."
기이한 발음의 이유를 겨우 납득하며, 키리히메는 꽃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확실히 생전에는 이렇게 생긴 꽃은 본 적이 없었다. 수수께기가 하나 풀린 것 같았다. 그러나 사니와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다른 수수께끼가 그 자리를 메웠기 때문이었다.
"그럼 전통적인 의미는 없겠네."
"그럴 거야. 덧붙여서 방금 알려준 그 이름은 사실 여러 종류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야. 국화처럼."
쿠와나는 설명을 슬쩍 덧붙이고는 다시 부엌 쪽으로 향했다. 저 수확물들은 오늘 저녁 식사에 오르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키리히메는 오늘 저녁 식사 당번에 카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떠올렸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의미를 가르쳐줄까. 그러나 직접 대놓고 묻기에는 멋쩍었다. 무엇보다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 카센이 낙담할까 봐 두려워, 키리히메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나라에서 의미가 있던 걸까… 아니면 색에 의미가 있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린 노란 꽃은 그 꽃잎 하나하나에 수수께끼를 매단 채, 속절없이 밝게 피어 있었다.
일이 빠르게 끝난 오후, 혼마루의 주인은 혼마루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여러 남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하늘이 맑을 적에는 다도실에 앉아 차를 마시던 미카즈키에게 노란색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렸을 적에는 정원을 산책하던 다이한냐에게 꽃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식사를 끝내고는 자리를 치우던 코테기리에게 노란색을 장식한 옷의 의미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밤에는 서재에서 책을 뒤지던 쵸우손에게 다른 나라의 문학 속 이 꽃의 의미에 대해서도 물었다.
"고귀한 색이지. 어느 나라에서는 검은색과 함께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단다."
헤이안 문화 그 자체로 빚어낸 듯한 천하오검은 그렇게 대답했다.
"관상용으로 빠르게 퍼진 꽃이구나. 잎을 떼고 꽃 한 송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양 같으면서 친숙한 미를 자랑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오사후네파의 격 높은 타치는 그렇게 대답했다.
"밝은 느낌을 주기 위해 걸칠 때가 많죠. 지금은 가을이니까 다른 따뜻한 색과 맞춰 입으면 더욱 어울려요."
현대의 무용과 춤에 열심인 고우파의 와키자시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이 꽃에 관하여 슬픈 연애담이 전해지기도 하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이야기야."
도검박사라 불리는 학자풍의 우치가타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뚜렷한 답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다양한 답이 돌아왔지만, 어느 것도 카센이 꽃을 건네준 이유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껴서 걷히지 않는 화사한 안개에 한숨지으며, 키리히메는 방 안에 꽃병을 올려놓았다.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까,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니와는 가만히 꽃을 바라보았다. 등불빛을 입어 살며시 타오르는 듯한 노란 꽃은 낮보다는 조금 기운이 죽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워, 마치 한낮의 햇빛을 한 꼬집 뜯어내어 담아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오후, 카센은 다도실에 앉아있었다. 대련을 마치고 몸을 씻은 후 정갈히 앉아 차를 음미하는 남사의 모습은 미술품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미술품으로서도 가치 높은 칼에서 태어난 존재이니 어느 정도는 본질을 꿰뚫는 감상이었을까. 키리히메는 다도실에 들어와 조심스레 그 맞은편에 앉았다.
"이런, 주인도 차를 마시러 온 거니?"
"응."
키리히메는 애매하게 웃어 카센의 말에 답했다. 카센은 고아하게 웃으며 차를 따라 주인에게 내밀었다. 입에 머금은 차의 맛은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조금 더 씁쓰레했지만 향기가 무척 좋았다.
"새로 손에 넣은 찻잎이란다. 어제 함께 사 왔지. 양이 적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야."
"그렇구나……."
키리히메는 조용히 다완을 다시 입에 가져다댔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카센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기품이 넘치면서 약하지 않고, 색이 뚜렷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그야말로 우아한 남사. 그런 그가 건네주고 갔던 노란 꽃이 문득 그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여, 키리히메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저기, 카센."
"무슨 일이니?"
"이런 거, 물어도 될까 싶지만……."
키리히메는 조심스레 서두를 떼었다. 카센이 다구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주인을 응시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키리히메는 말을 더듬거리려는 입술을 채근했다.
"어제, 카센이 나한테 준 꽃, 기억해?"
"응? 아아, 물론 기억하다마다."
"응, 그거. 그거 말인데, 꽃의 의미, 가르쳐줄 수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찾아봤지만 그… 아직 공부가 부족한 거 같아. 꽃말이나 문학적인 의미 같은 거, 있을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서……."
말끝이 흐려졌다. 입으로 내니 새삼 부끄러워져, 키리히메는 한손으로 무심코 제 입가를 가렸다. 살짝 눈을 감았던 사니와는 몇 초 후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위로 들었다.
카센은 눈이 휘둥그레져 제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고 힘있는 눈동자가 깜빡이고, 고운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당황해서 그런 것일까, 실망이 커서 그런 것일까. 키리히메는 초조함에 제 입가를 꾹 눌렀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기 위해 사니와가 입술을 벌린 그 순간, 카센이 어깨를 들썩였다. 곧 그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카, 카센?"
키리히메는 깜짝 놀랐다. 카센으로서는 보기 드문, 소리를 내는 큰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을 때는 많았지만, 목을 울려 크게 소리내 웃는 것은 경망스러운 행동이라며 잘 하지 않으려 했다. 제 후손격인 남사인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가 그렇게 웃자 마뜩찮게 바라보며 우아함이 부족하다고 훈계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단 둘이 있는 다도실 안이라지만, 이렇게 소리내어 크게 웃는 모습은, 키리히메에게는 무척 낯선 광경이었다.
"카센, 저기."
"하하하,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우아하지 못한 행동거지를 보이고 말았구나."
카센은 눈가를 훔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밝은 기색 역력한 얼굴로, 카네사다 도파의 문과계 우치가타나는 답을 고했다.
"꽃말과도 의례와도 문학과도 관계 없어. 그건 그저, 네가 그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었는데."
"어?"
키리히메는 멍해져 눈을 깜빡였다. 카센은 너무 웃어 눈물이 서린 눈가를 다시 깔끔히 정돈하고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어린 기색은 어제 좋은 문진을 사 왔을 때보다도 밝았고, 한편으로는 평소의 그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가벼운 유쾌함도 서려 있었다. 그 생글거리는 눈빛에, 사니와의 마음속에 서서히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하얀 머리칼의 사니와는 양 옷소매로 제 얼굴을 가린 채 얼굴을 폭 수그려버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 볼이 화끈거렸다. 아름답다고 말해준 것에 마음이 동요한 것인지, 약 하루 동안 헛다리를 짚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것이 민망했던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어질어질 도는 머리로 키리히메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도저히 말은 떠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일어나 뛰쳐나가기에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으니, 사니와의 머리 위에서 우치가타나의 상냥한 웃음소리가 내려왔다.
"그렇게 깊이 생각할 문제였니?"
"그게, 카센이 준 거니까, 뭔가 복잡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런, 나는 네게 그렇게나 어려운 인상이었던 걸까."
카센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키리히메는 더욱 얼굴을 아래로 수그렸다. 창피하고, 멋쩍고, 미안했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 카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다도실 바닥의 결만을 시선으로 파헤쳤다.
그 때, 그 시선 끝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닥에 하늘하늘 흘러내려 닿은 작은 조각은 마치 벚꽃 꽃잎 같았다. 벚꽃이 필 계절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으나, 키리히메는 그것이 무엇인지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도검남사의 기운이 특별히 넘치고 기분이 고양될 때면 종종 흩날리는, 벚꽃 꽃잎 같은 모양으로 뭉쳐진 신력의 조각이었다. 그것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반은 짐작하고 반은 믿지 못하며, 키리히메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카센의 표정과 마주했다.
카센의 볼이 발그레하니 상기되어 있었다. 어느새인가 주인의 곁에 다가와 앉은 도검남사는, 주인을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한창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것과 마주한 것처럼, 늘 갖고 싶어했던 보물을 손에 넣은 사람처럼, 황홀경에 빠진 눈빛이 또렷이 빛나며 녹아내렸다.
"정말이지, 주인은."
그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어제 선물한 꽃의 꽃잎만큼이나 선명하고 들뜬 음색이었다. 키리히메는 눈을 깜작일 새도 없이, 자신을 향해 상냥히 뻗어오는 카센의 두 팔을 보았다. 다음 순간 몸이 흔들려, 사니와는 남사의 품 속에 꼭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