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6.07.17 검사니 전력 60분 : 1주년
1월 밤의 쌀쌀한 공기가 사니와 키리히메의 뺨을 깨물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휘젓던 둥실둥실한 기운이 후두둑 떨어져내리고 눈앞이 한층 맑게 개였다. 키리히메는 등을 쭉 펴며 숨을 내쉬었다. 술 향기가 실린 날숨이 하얗게 밤하늘에 섞였다.
"주역이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연회장 문 안쪽에서 왁자지껄 맴돌던 목소리 중 하나가 곁에 흘러들어왔다. 키리히메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남사를 보고 눈을 깜작였다. 금색 키나가시가 회장의 불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며 사니와의 눈을 톡톡 건드렸다.
"하치스카? 혹시 안에서 찾았어?"
"아니, 아직은. 다들 요리며 술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그래도 눈치채는 건 시간 문제일 거야."
하치스카는 연회장 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쉰 명이 넘는 남사들의 목소리가 왁자왁자 끓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주인의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키리히메는 발갛게 변한 뺨을 한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들어갈게."
"그렇게 해 주면 좋겠...는데, 잠깐, 몇 잔이나 마신 거야?"
말하던 중 하치스카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곁에 다가온 남사를 향해 돌아서는 키리히메의 발걸음이 휘청 흔들린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손으로 가린 너머의 뺨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에 키리히메가 배시시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에 건배한 걸 빼면 서너 잔 정도."
"그렇게나? 술도 잘 못 하면서."
"권하는 걸 거절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잠깐 정신 차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키리히메의 말투는 아직 동실 떠올라 있었다. 하치스카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누가 권한 거야, 대체. 쿠로다 쪽 창은 술을 권하는 성격은 아니고... 역시 그 대태도야?"
"지로타치랑 무츠노카미."
그 말에 맞추듯 연회장 안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술에 잔뜩 취해 발음이 꽤 꼬인 도사 방언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듯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무츠노카미도 참, 하고 혼잣말을 하며 키리히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하치스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은 아까 전 가볍게 타이르는 말을 꺼낼 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그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듯 두어 번 뻐끔거리다 겨우 열렸다.
"무츠노카미 요시유키라면 네가 술에 약한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응, 하지만 무츠노카미, 꽤 취해 있었으니까. 무츠노카미는 술기운이 오르면 주변에 권하는 게 버릇이고....."
"잘 아는 모양이네."
하치스카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그러나 그 한기를 겨울 밤의 쌀쌀한 공기와 착각한 키리히메는 평소처럼 부드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초기도니까. 혼마루에서는 제일 오래 같이 있었고."
"그래...... 잠깐 앉는 게 어때? 다리가 휘청이고 있는데, 조금 더 쉬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네."
아까 전에는 빨리 들어오는 게 좋다고 얘기했으면서, 코테츠의 금빛 우치가타나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키리히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것을 짐짓 모른 체 하며, 하치스카는 마루에 앉아 자신의 옆을 톡톡 두드렸다. 키리히메는 잠시 연회장 문에 시선을 준 후, 그의 곁에 앉았다. 확실히 아직 머리 한구석이 멍했기 때문이었다.
키리히메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눈 쌓인 정원을 눈동자에 담은 옆모습을 하치스카는 바라보았다. 서로 엇갈리던 숨소리의 박자가 비슷해질 무렵, 하치스카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도 될까?"
"응?"
"어째서... 무츠노카미 요시유키를 초기도로 고른 거야?"
중간에 뜸을 들인 건 말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어째서 자신을 고르지 않았냐고 운을 뗄 뻔했던 것이다. 이상한 간극을 눈치채지 않기를 하치스카는 속으로 바랐다. 다행히 키리히메는 그의 질문에 어찌 대답할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딱히 그걸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어째서냐고 물어도... 잘 기억이 안 나. 딱히 이유는 없었던 거 같아."
"이유 없이라니....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거네, 그는."
하치스카는 맥이 탁 풀렸다. 딱히 도사의 명도를 눈여겨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초기도로 선택받은 행운을 질투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목덜미를 긁적이는 하치스카를 이번에는 키리히메가 빤히 응시했다.
"하치스카는 초기도였으면 좋겠어?"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애매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대답 자체는 선문답하듯 바로 튀어나왔다. 주인과 시선을 마주치는 하치스카의 얼굴은 술을 여러 잔 권유받은 것마냥 발그레한 혈색을 띠고 있었다.
"오늘 1주년을 맞이한 건 정확히는 너와 그 자이니까. 내가 여기 온 지 1주년이 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고."
"의외네, 그런 거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하치스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히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신이 제일 놀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에도, 이런 말을 입밖으로 술술 말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오늘이 내게도 온전히 1주년이면 좋았을 텐데."
그 목소리는 키리히메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사의 입술에서 흘러넘친 말은 발자국이 패인 정원 눈 위에 쌓여 스며들었다.
키리히메는 하치스카의 표정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은 일견 평온해 보였으나 눈동자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깨문 후, 키리히메는 나지막이 말했다.
"초기도가 아니어서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해."
"그런 점, 있었던가?"
"응. 하치스카한테는 번듯한 주인으로 남을 수 있잖아."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키리히메는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초기도 무츠노카미나 초기에 온 단도들에게 이런저런 실수를 지적받았을 때의 일을 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하치스카는 혼마루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후 왔기에 그 때의 실수담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에 키리히메는 밝게 웃었다.
사니와는 웃었고, 남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둘 사이에 말이 더 이어지려던 순간, 연회장 문이 벌컥 열리고 큰 목소리가 덮쳐왔다.
"밖에서 뭐 하는 거여? 안에 빨리 들어오는 게 좋어, 지금 굉장한 도미 요리가 나왔응게!"
취기가 잔뜩 올라 표정이 한껏 과장된 무츠노카미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키리히메는 어깨를 떨구고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자락을 톡톡 턴 그녀는 아직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이 없는 하치스카를 돌아보았다.
"슬슬 들어가는 게 좋겠어."
"먼저 들어가. 조금 더 있다 들어갈게. 우라시마한테도 좀 있다 들어간다고 얘기해 줄래?"
하치스카는 머리를 짚고 술기운이 오른 시늉을 하며 말했다. 키리히메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알았다고 말한 후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힌 후, 하치스카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전 그의 주인이 눈길을 주던 곳에 눈길을 꽂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미숙하던 시절까지 보고 싶은데."
이런 말까지 입 밖에 내다니,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술기운이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하치스카는 목을 젖혀 시린 밤하늘에 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