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담소 사이에 부엉이 울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종이공을 접기 위해 한참을 낑낑대던 아키타가 고개를 들어 창문에 시선을 던졌다. 반달 끄트머리가 창문 윗자락에 걸려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은 거 같아요."
"얼마나 지났다고 그... 어, 뭐야, 벌써 이렇게 됐어?"
새 색종이를 꺼내들려던 타이코가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이마를 탁 쳤다. 평소라면 벌써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있을 시간이었다. 구겨진 종이에 울상을 짓고 있던 고코타이도, 이제 막 나룻배를 접은 아츠시도 시계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다, 이치 형이 자라고 얘기하러 오지도 않았는데."
"이치고는 오늘 순찰 당번이니까."
사니와 키리히메가 쓴웃음을 지었다. 토시로들을 포함한 많은 단도들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며 고민에 빠져있던 이치고의 모습이 눈 앞에 다시 그려졌다.
"그런 거였어? 아무튼 슬슬 치우고 자자. 대장도 방에 가서 쉬어야지."
"에- 아직 더 놀아도 되잖아."
시나노가 볼을 부풀리고 목소리를 바닥에 흘렸다. 키리히메의 무릎에 누워 뒹굴대던 그가 고개를 살짝 앞으로 돌리자, 흩어진 색종이를 모으던 아츠시가 눈썹을 치켜떴다.
"되긴 뭐가 돼. 벌써 자고도 남을 시간인데."
"대장도 아직 졸린 거 같지 않고, 괜찮잖아? 그렇지, 대장?"
"안 괜찮거든? 우리야 야전에 강하니까 그렇다쳐도, 대장은 밤에는 자야 한다고. 그렇지, 대장?"
시나노와 아츠시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동시에 키리히메를 빤히 쳐다보았다. 키리히메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 대신 하품이 흘러나왔다. 아츠시가 것 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까 전에 접었던 토끼공을 시나노의 어깨에 던졌다.
"봐, 대장도 피곤해 보이잖아. 그러니까 슬슬 일어나지? 계속 그러고 있으면 대장이 일어날 수가 없잖아."
"치... 그럼 대장 옆자리에선 내가 잘래."
"뭐?"
겨우 몸을 일으키나 싶던 시나노가 던진 말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를 펴던 키리히메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렸고, 찬장에 종이를 집어넣던 타이코가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대장 옆에선 내가 잔다고. 선수필승. 있지, 품에 들어가도 돼?"
"아니, 그거 이전에... 애초에 주인이랑 우리는 따로 자잖아."
타이코가네가 바닥에 깔린 이불들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이불 수는 지금 방 안에 있는 이들 숫자보다 정확히 한 장 더 적었다. 제일 최근에 혼마루에 들어온 타이코가네가 아는 사실을 그보다 일찍 온 시나노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시나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불장을 열었다. 그득히 쌓인 예비용 요를 끌어내는 움직임이 능청스러웠다.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대장, 창가가 좋아, 문 쪽이 좋아?"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대장은 대장 방에서, 우리는 우리 방에서!"
아츠시가 다다미 바닥을 팡팡 두들겼다. 시나노가 입을 비죽 내밀고는 키리히메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키리히메가 여기서 자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주길 요구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이 유독 잔망스러웠다
키리히메는 쓴웃음을 머금고 시나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붉은 머리를 결을 따라 매만져주며 사니와는 입을 열었다.
"시나노 마음은 고맙지만, 나까지 여기서 자면 방이 좁아질 거야."
"원래부터 여럿이서 쓰는 방이니까 괜찮아, 그리고 너무 좁으면 내가 대장 품에 들어가면 돼. 그러니까, 응?"
"그, 그래요, 주인님이 여기서 자도, 저, 저희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고코타이가 주저주저 말을 꺼냈다. 키리히메가 헛웃음을 지었고 아츠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타이코가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질질 달라붙는 건 멋있지 않다고. 구분할 건 구분하는 게 좋아. 게다가 네가 품에 달라붙어 있으면 주인이 밤새 쉴 수나 있겠어?"
"으, 하지만......."
시나노의 말끝이 흐려졌다. 지금까지 접은 것들을 소쿠리에 담던 아키타가 키득키득 웃었다. 손의 빠른 정도에 따라 접은 숫자는 달랐지만, 키리히메가 접은 것은 공토끼 두세 개가 전부였다. 품에 파고들거나 무릎 한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시나노와 놀아주느라 손이 바빴던 탓이었다.
요즘 들어 시나노의 어리광이 유독 잦아지고 있다는 것은 키리히메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원래부터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이었고 혼마루에 왔을 때부터 품에 들어가도 되냐는 등의 말을 서슴없이 하던 아이였지만, 요즘 들어 그 빈도가 늘어났던 것이었다. 원래 토시로 단도 중에서 빠릿빠릿한 편인 아츠시나, 단도들 중에서는 어른스러운 축에 속하는 타이코가네가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키리히메는 눈꼬리가 축 처지려 하는 시나노의 앞머리를 가볍게 퐁퐁 두드려주었다.
"다음에 또 올게. 모두 푹 쉬어."
"응, 잘 자-"
"다, 다음에도, 놀아 주시는 거에요...!"
아츠시가 씨익 웃으며 이불에 엎어졌고, 고코타이가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키리히메도 웃으며 방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가 스르륵 드러났다. 방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래도 손에 드는 등불 정도는 필요할 것이었다. 문 근처에 놔두는 휴대용 등롱을 찾던 키리히메의 옆으로 시나노가 한 걸음 내딛어 복도로 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등불을 보고 키리히메가 눈을 깜빡였다.
"방에 데려다 줄게. 나, 내일 근시고, 이 정도는 괜찮지?"
"괜찮겠어? 시나노도 피곤할 텐데."
"으으응, 전혀."
시나노는 생글생글 웃었다. 키리히메는 고마움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왔다. 그 등 뒤에서 타이코가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아키타가 키들키들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
남사들의 침실이 있는 구역에서 사니와의 개인실이 있는 곳까지는 복도가 제법 이어져 있었다. 복도를 걷는 소리가 삐걱삐걱 울렸고, 멀리서 바람 소리나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시대에는 야생 부엉이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역시 이매망량의 세계라 야생동물이 많은 것일까... 하고 키리히메는 멍하니 다른 것을 생각했다.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자 사니와의 방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에 들어왔다. 키리히메는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 걷는 시나노의 등에 시선을 던졌다. 비장의 아이(秘蔵っ子)라는 수식어답게 당당하다기보다는 섬세한 느낌이 드는 몸이었지만 어딘가 선이 확실한 구석이 있었다. 등불 빛을 역광으로 받아서 그런지 유독 그림자가 짙어 보였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시나노."
방문 앞에서 걸음이 멎자 키리히메는 시나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시나노가 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늘 웃음기나 장난기를 머금고 있는 천진난만한 얼굴에 음영이 짙게 깔려 있었다. 등불의 빛을 입은 눈이 또르륵 굴렀다.
"대장, 같이 자면 안 돼?"
"응?"
시나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등불을 내리지도 않았고, 방문을 열거나 키리히메에게 한 발자국 내딛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키리히메를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게감이 있어, 키리히메는 마치 시나노가 손을 내밀어 팔을 꽉 틀어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같이 자고 싶어?"
"같이 자고 싶다....기보다는, 대장 품에 들어가 있고 싶어. 일어나 있어도, 자고 있어도 돼."
시나노가 눈을 깜빡였다. 등불 빛이 슬쩍 일렁여, 시나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좀 더 짙게 바꾸었다.
"이치 형한테도, 아츠시한테도, 다른 남사들한테도 얘기 자주 들어. 요즘 대장을 자주 귀찮게 구는 거 같은데 자제하라고. 오늘은 타이코가네도 그렇게 말했고, 어제는 하세베 씨한테도 그런 말 들었어."
"그래?"
"응. 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시나노가 귀찮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그 대답에 시나노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왔다.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아 키리히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림 하나 없는 눈동자가 어째 곧 톡 하고 터져 흘러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품에 들어가 있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텐데."
고요한 복도에 시나노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흘러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라도 났다간 거기에 갈려버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어딘가 스산해서, 키리히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시나노?"
"....응, 미안!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줘. 또 대장한테 어리광부렸다고 혼날 테니까."
시나노가 쾌활하게 말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방 안의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복도까지 흘러나와 그림자를 헤집어 엎었다. 등불빛이 아닌 다른 빛이 들어온 시나노의 표정은 평소처럼 생기 흐르는 밝은 표정이었다.
"내일은 내가 근시고, 대장 품에 들어갈 기회는 낮에도 많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응."
"시나노도 참."
키리히메는 시나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처럼 배시시 웃는 표정과 평소처럼 낭창낭창하면서도 선이 확실한 팔에 키리히메는 속으로 안심했다.
자기 방에 들어선 키리히메가 방의 등불에 불을 밝힐 때까지 시나노는 줄곧 입구에 서 있었다. 등롱에 불이 켜지자 그제야 시나노는 문에 손을 올렸다.
"그럼 대장, 잘 자."
"응, 시나노도 좋은 밤."
손을 흔들어주는 키리히메의 모습이 천천히 방문에 가려졌다. 문에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도록 몇 걸음 물러서서 시나노는 그 문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문 너머의 사니와는 지금쯤 누구를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에 대한 생각은 품 속에 맺혀 있을까. 다른 이들이 쉽사리 주인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품에 파고들고 자신의 무게감과 존재감을 자랑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혼마루에 있는 수많은 칼들 사이에 묻혀, 비장의 아이라는 말 그대로 숨겨져 버릴 테니까. 그런 생각이 시나노의 입술까지 올라왔다 날숨이 되어 떨어졌다.
소리나지 않게 뺨을 한손으로 비비며 시나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니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꺼진 후에야 그는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