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의 창작 사니와가 등장합니다
※ 지인의 창작 혼마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Thanks to. ㅇ님
무성히 자라난 대나무숲 사이로 난 흙길은 댓잎에 드문드문 덮여 있었다. 청년은 그 오솔길을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행여나 벌레 손님을 밟을까 조심스레 발을 내딛자 댓잎이 부벼지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바람에 스치는 대나무 가지 사이로, 연화경을 읊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댓잎 향기 좋네.”
청년의 뒤를 따라 사뿐사뿐 걷던 여인이 중얼거렸다. 청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툼한 장발이 흔들려 흙길에 커다란 그늘을 만들었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
여인은 제 입을 손에 들고 있던 부채 같은 것으로 탁 쳤다. 편하게 말하라고 했는데 자꾸 존댓말이 튀어나오게 된다며 스스로를 나무라듯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연화경을 읊던 때보다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는 말을 꺼냈다.
“대나무 숲이 마음에 드십니까?”
“향기나 바람 소리가 좋아. 쥬즈마루는 수행할 때면 늘 이런 곳을 찾아?”
“때로는 산길을 넘고, 때로는 저잣거리를 걸으며, 때로는 강을 따라 걷습니다. 불도를 구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쥬즈마루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흩날리는 그의 장발은 마치 뒤를 따르는 여인에게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숨기는 베일 같았다. 여인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쥬즈마루는 이 숲을 좋아하지 않아?”
“마음이 편해지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이 숲이 둘러싸고 있는 장소는 조용히 잠겨들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러한 장소를 만들어 준 대나무에게 감사합니다.”
“쥬즈마루는 천인 같은 데가 있어.”
여인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쥬즈마루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다음 길에서 살짝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길잡이를 따라 갈림길의 한쪽 길로 들어간 여인의 등 뒤로, 젖혀 올라갔던 대나무 가지가 내려와 길이 있던 곳에 장막을 쳤다.
***
“도착하였습니다.”
쥬즈마루가 그렇게 고하며, 좁은 대나무길에서 빠져나오려는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야가 좁던 대나무 군락을 빠져나온 여인은 갑자기 확 트인 눈앞에 잠시 발을 헛디뎠다. 자세를 바로잡고 눈을 똑바로 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그 곳은 마치 옅은 색을 입힌 섬세한 수묵화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호수를 옆에 두고 대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평지가 거기 있었다. 크기는 혼마루의 정원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호수의 물이 워낙 맑고 넓게 펼쳐져 있어서 그런지 더욱 넓게 느껴졌다. 대나무숲에 가까운 쪽에는 두 명이 살 수 있을 법한 오두막이 문을 활짝 연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에는 소박한 이부자리와 몇 권의 경전 정도만 놓여 있었다. 밝은 흙색 집은 누가 일부러 지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곳에 자라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여인의 마음을 끈 것은 호수와 오두막 사이에 생긴 연못이었다. 하늘이 비칠 정도로 맑은 호수와 대조적으로 살짝 짙은 색을 띤 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래서 그 위에 한껏 피어난 것들이 더욱 돋보였다.
“연꽃을 좋아하십니까? 텐스이.”
이름을 불리자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연못 곁에 쭈그려 앉아 연꽃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던 것이다. 부채로 상기된 뺨을 가리며 텐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꽃 자체는 그냥 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연꽃들은 무척 예뻐. 수정으로 정교하게 만든 것 같아.”
“자연이 생명으로 정교히 만들어낸 것이지요.”
어느새 쥬즈마루가 텐스이의 곁에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연잎 중 하나에 떨어져 있던 연꽃 꽃잎을 집어올렸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텐스이의 머리에 얹었다. 푸른 머리칼 사이에 걸린 연꽃잎을 보며 쥬즈마루는 읊조리듯 말했다.
“진흙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법도를 피워내는 그 모습은 관세음보살과 같습니다. …이 모습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꽃잎에 감긴 텐스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감긴 듯한 두 눈이 무엇을 보는지 텐스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쥬즈마루가 천천히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킬 때까지 그의 얼굴을 응시할 뿐이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텐스이와 쥬즈마루의 머리카락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휘날렸다. 두 머리카락이 서로 얽혀, 마치 구름이 하늘에 덮힌 것 같은 베일이 만들어졌다. 바람이 그치자 텐스이는 바람이 불어왔던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자라고 있는 밭과 거기서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진 호수가 분명히 보였다.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텐스이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텐스이.”
갑자기 쥬즈마루가 그를 불러세웠다. 텐스이는 그를 돌아보았다.
“응?”
“당신은 이 곳이 마음에 듭니까?”
그 말에 텐스이는 주위를 휘이 둘러보았다. 대나무 향기에 둘러싸인 땅, 한쪽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널리 펼쳐진 호수, 푸릇푸릇한 기운이 덮이기 시작한 밭이 시선에 들어왔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쥬즈마루의 곁에는 아름다운 연꽃들이 자리잡은 연못이 있었고, 그의 등 뒤에는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늑한 오두막이 있었다. 살랑 부는 바람에 텐스이의 머리칼 한켠에 얽힌 연꽃 꽃잎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텐스이는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아해.”
“그렇습니까. 조금 더 밖을 둘러보고 계십시오. 저는 안에서 차를 좀 우리고 있겠습니다.”
오두막으로 들어가기 전, 쥬즈마루는 분명 텐스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눈이 정확히 어떤 색이었는지 텐스이는 기억할 수 없었지만, 그 얼굴에 비단으로 수놓은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쥬즈마루가 오두막에 들어간 후에도 텐스이는 한참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호수 쪽에서 무언가 뿅 튀어오르는 듯한 물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그녀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대답하며 쥬즈마루는 조용히 차를 우려냈다. 옅은 녹색의 액체가 두 개의 찻잔에 쪼르르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평온했다.
차 줄기가 끊겼다. 쥬즈마루는 잔을 몇 번 돌린 후, 아직 열려있는 채인 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호숫가에 서 있는 텐스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천인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문자 그대로 천녀(天女)인 셈이군요.”
그 목소리만은 평소 쥬즈마루 특유의 구름에 실려 얘기하는 듯한 어조가 아니었다. 보다 현실의, 정확히는 땅바닥에서 솟아나오는 듯한 말투였다.
그들의 사니와인 텐스이는 말 그대로 천인이었다. 아득한 천계에 속한 존재들로,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계의 거주자로서의 천인과도 닮은 곳이 있었다. 불도의 길을 걷는 신령인 쥬즈마루에게 있어서 그 사실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괴로운 것이기도 했다. 신령이라 하나 결국은 이 세상에 매인 몸인 그로서는 하늘에 속한 여인을 가로챌 수 없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아도, 하늘을 내 품 속에 우겨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처럼 색(色)과 정(情)으로 붙들어매는 것도 불도에 속한 내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쥬즈마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털어놓는 고백 같은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을 이끄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나가고 싶다고 바라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들키는 일이 없는 저의 신역으로.’
쥬즈마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의 눈에는 옷소매를 흠뻑 적신 채 오두막을 향해 다가오는 텐스이가 비치고 있었다. 수생식물이나 물고기를 건드려 보려가다 옷을 적신 모양이었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독백은 평소의 쥬즈마루와 같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는 제 주인의 옷소매를 걷어주며 오두막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자신이 어느 새 누군가의 신역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텐스이는 방에 들어와 찻잔에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