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독신(독자설정 포함)이 등장합니다
※ 영걸(센노 리큐)×독신 성향
"독신 공(独神殿), 날이 밝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이불을 살살 흔들었다. 단호하면서도 결코 우렁차지 않은 그 부름은 한겨울에 빈 찻잔에 차를 따를 때 나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다성(茶聖)이라 일컬어지는 영걸 센노 리큐이기에 그 언동 하나하나가 다도의 미학을 구현하는 듯한 모습인 것일까, 리큐 본인을 포함해 그 답을 아는 이는 없었다. 부름에도 좀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새근거릴 뿐인 이불 뭉치 속의 독신도 마찬가지였다.
리큐는 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도 늦게까지 일하다 잠든 게 분명하다고 그는 확신했다. 자기 전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독신의 침소 쪽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던 것이 기억에 선했다. 맡은 직무에 충실한 것은 미덕이나 자칫하면 심신을 망칠 터인데. 일어나 조금 정리되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좋은 차라도 내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리큐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것이지, 독신 공. 이대로면 아침이 지나버리고 말 텐데."
"으… 응……."
이불 뭉치가 반응을 보였다. 꽁꽁 싸매여 있던 이불 더미가 조금씩 풀리고, 그 안에서 사람의 온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을 무의식중에 귀 뒤로 넘기며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독신을 리큐는 정좌하고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시야를 정돈하던 독신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옆으로 누운 독신의 눈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리큐의 눈이 마주쳤다.
"리, 큐…… 앗, 죄송해요, 지금 일어날게요!"
눈앞의 영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무섭게, 독신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서 완전히 일어나 서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어려워 상반신만 일으킨 것이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불이 확 제껴지고 윗몸을 세우는 모습에 리큐도 독신 못지않게 화들짝 놀랐다. 살짝 기운 제 관을 고쳐쓰며 리큐는 눈을 깜박였다. 이불에 바로앉은 독신이 어떻게든 잠을 깨려고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직 빗지 못한 머리가 가지를 정리하지 않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나부꼈고 두 눈에는 아직 안광이 맑게 돌아오지 않아 초점이 흐릿했다. 그러는 중에도 어떻게든 잠기운을 쫓으려 미간에 힘을 주는 독신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에 리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상대로는 그렇게까지 긴장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차올랐던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깨우러 온다 하여도 이런 반응일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극력 피하고 싶지만, 만약 다른 이가 독신의 잠을 깨우는 담당이 된다면 그 때도 독신은 이렇게 급히 태도를 가다듬으려 무리할까. 리큐는 잠시 평소 독신의 행동을 되짚으며 상상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야 가다듬겠지만 자신에게 보이는 이 모습처럼 무리하진 않을 듯했던 것이다.
확실히 센노 리큐는 다도에 있어서 철저하고 늘 자신의 미학을 굳게 고수하는 이였다. 그것을 위해서 늘 행동거지를 까다로이 관리하며 항시 정갈한 몸가짐을 유지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표정도 다른 이에 비해서 굳은 편이다 보니, 냉담하고 냉철한 성격이라는 인상을 많이 사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심지어 독신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것은 리큐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것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미학을 지키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반가운 일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인상이 살짝 밉게 느껴져, 그는 옷소매 속으로 손을 꾹 쥐었다.
'귀공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리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독신은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선물을 가져다줄 때도, 함께 다도를 즐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잘 되짚어보면, 함께할 때의 독신은 리큐를 한 단 위에 앉혀놓고 대접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어떤 형태로든 호의를 비쳐 준다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리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미움받는 것보다야 낫지만, 가능하다면 독신이 조금 더 자신에게 그 마음을 허락해 준다면 좋으련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리큐의 입꼬리가 우울함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불쾌하다는 빛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독신이 연거푸 제 머리를 귀 뒤로 넘기기 시작했다.
"……흠."
독신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손을 들려던 리큐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늘 한 단 위에 모셔지듯 독신과 접해오던 자신이라면, 자신이 한 걸음 내려오면 되지 않을까.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이기 때문인지 사고가 평소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흰 빛의 다도가는 손을 제 가슴에 얹고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옆에 내려놓았다.
"리큐?"
독신이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라면 자신보다 아래에서 들릴 그 목소리가 지금은 자신보다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것 또한 신선하구나, 하고 생각하며 리큐는 독신을 올려다보았다. 다다미 바닥의 결이 왼쪽 볼에 눌려 가벼운 통증을 주었다.
방금 전까지 깔끔히 정좌하고 있던 센노 리큐는 독신의 이불 옆, 다다미 바닥 위에 넙죽 엎드려버렸다. 내려놓았던 관은 머리에 치여 넘어져 굴렀고, 단정히 걸치고 있던 흰 옷도 바닥 위에 흐르듯 옷자락을 펼쳤다. 곱게 빗었던 흰 머리카락은 사르락 흐트러지고, 말끔하던 얼굴은 한쪽 볼이 다다미 바닥에 눌려 살짝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마치 고니가 목을 제 몸에 묻고 잠든 듯한 모습으로, 하지만 평소의 센노 리큐에게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격식 없는 모습으로, 그는 바닥에 옆으로 엎드려 독신에게 시선을 던졌다.
독신은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놀라고 있었다. 늘 예의범절을 철저히 지키는 영걸이 격식을 내던지고 풀어져 있다는 것이 그저 얼떨떨하고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아까 전까지 잠기운이 아롱아롱하던 눈이 퍼뜩 뜨여 깜빡였다. 그 눈을 옷소매로 몇 번 부빈 후, 독신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리큐, 대체……?"
"과연. 이 방은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서 해이해져 버리고 마는군. 독신 공이 쉬이 일어나지 못한 것은 이 방의 탓도 있음이련가."
리큐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계속 독신을 향해 있었다. 이 혼잣말을 귀공이 듣고서 자신이 이렇게 엎드린 연유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은… 예의를 내려놓은 모습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변명하려는 것이던가.
독신은 자신을 깨우러 왔다가 누워버린 영걸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편하게 누워 뒹굴거리고 있는데도, 리큐는 지금 모습이 평소보다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격식을 차리는 것이 더 힘든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는 격식을 버리는 것이 더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굳이 태도를 풀어주는 것이 놀랍고 기뻐, 독신의 입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무리하고 있지는 않나요?"
독신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살짝 몸을 이쪽으로 숙이고 다정히 물어오는 질문에, 리큐는 눈의 힘을 풀며 대답했다.
"흐음… 상시 미학을 추구하는 내게, 신조를 내려놓고 풀어지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귀공과 눈을 마주할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고 리큐는 눈을 가늘게 접어 미소지었다. 평소 표정이 굳은 편인 그이기에 그 미소는 더더욱 보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휘저었다. 가슴 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감추며 독신이 후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리큐가 이렇게 뒹굴뒹굴 엎드려 있는 걸 다른 분들이 보면 큰일일 거 같아요."
"다도를 지도하는 모범으로선 격이 떨어질지도 모르겠군."
"아하하."
쑥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리큐의 말에 독신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늘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영걸을 바라보던 본전의 주인은, 곧 아까 전처럼 이불에 도로 누워버렸다. 이불에 머리를 폭 대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옆으로 누워 리큐와 완전히 눈높이를 같게 맞추며, 독신은 볼에 살며시 홍조를 띄웠다.
"귀공이 이렇게 엎드려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보아도 큰일일 텐데."
언뜻 듣기에는 나무라는 말을 나지막한 다정함을 담아 이야기하며, 리큐는 낙낙한 자신의 옷소매를 뻗었다. 흰 소매가 폭 껴안듯이 독신의 몸을 덮어 가려주었다. 평소에는 온몸을 팟 긴장시키던 독신이 오늘은 움찔하지도 않고 그저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사실이 너무도 기뻐, 고고한 인상의 다도가 영걸은 자신도 모르게 독신에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두었다.
독신의 잠을 깨운다는 본래의 목적은 이미 저만치 밀려나 나부끼고 있었다. 아주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사랑스러운 이와 모처럼 거리를 좁혔는데 조금은 더 이렇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리큐의 가슴 속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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