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와라에 대하여 :: 1. 요시와라의 역사, 구조, 하루



※ 1편(요시와라의 역사, 구조, 하루): http://rayelwr.tistory.com/11

※ 2편(요시와라의 구성원): http://rayelwr.tistory.com/12

※ 3편(유녀의 삶과 등급): http://rayelwr.tistory.com/13

※ 4편(오이란): http://rayelwr.tistory.com/14


[요시와라(吉原, よしわら, Yoshiwara)란 무엇인가?]


요시와라는 에도 시대, 오늘날의 도쿄에 해당하는 수도 에도에 두었던 지역입니다. 정부에서 허가한 창부인 공창(公娼)들을 수용하던 장소로, 에도 시대의 집권자인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에도에서 요시와라 이외의 윤락업소를 금지했습니다.

본래는 '갈대밭'이라는 뜻의 葭原(발음은 똑같이 '요시와라')로 표기했지만, 1626년에 좋은 기운을 받으라는 뜻에서 복을 뜻하는 글자인 요시(吉)를 집어넣어 吉原로 표기가 바뀌었습니다.


요시와라에는 크게 6개 조건이 있었습니다. 1~3번은 요시와라의 설립자인 쇼지 진에몬(圧司甚右衛門)이 올린 조건이고, 4~6번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추가로 덧붙인 조건입니다.


1) 손님은 한 번에 하루만 받으며, 손님은 장기 투숙할 수 없다.

2) 속아서 유녀로 팔려온 여성은 부모에게 돌려보낸다.

3) 범죄자가 요시와라에 들어온 경우 막부에 신고한다.

4) 에도에는 요시와라 이외의 윤락업소를 금지한다.

5) 유녀는 요시와라 외부의 시중에 파견되어서는 안 된다.

6) 유녀의 복장이나 유곽의 건물은 화려해서는 안 된다.


단 이 조항들은 후대로 갈수록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4번과 6번 조항이 잘 지켜지지 않아, 요시와라 외부에는 사창(私娼)이 범람했고 요시와라의 가게들은 화려한 옷으로 손님을 끌어모았습니다.




[요시와라의 역사]


요시와라는 1617년에 쇼지 진에몬(圧司甚右衛門)이 막부에 올린 요청으로 탄생했습니다. 당시 에도는 토목공사가 활발해 남성 인구가 크게 늘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윤락업소가 범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막부는 불법 업소를 단속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 때 본래 교토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하던 남성 쇼지 진에몬이 에도의 윤락업소를 한 곳에 모아 영업하고 싶다고 청하였고, 도쿠가와 막부는 윤락업소의 단속 및 관리가 쉬워지리라 판단하여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허가는 1617년 3월에 떨어졌습니다.


1618년 11월, 오늘날의 닝교쵸(人形町)에 구 요시와라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때에는 닝교쵸가 에도 외곽이었지만, 에도의 규모 팽창으로 구 요시와라가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막부에서는 1656년에 요시와라를 외곽 지역인 아사쿠사(浅草)로 옮길 것을 명령했습니다. 여기에 1657년에 일어난 메이레키 대화재로 구 요시와라는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아사쿠사 지역(오늘날의 우구이스다니(鶯谷) 역 근교)에 신 요시와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요시와라는 신 요시와라를 일컫습니다.


요시와라는 1872년에 유녀들에게 해방령이 내려지며 공창의 지위를 상실, 계약제로 운영되는 사창가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1958년에 일본 정부가 매춘 금지법을 발효하며 요시와라는 사라졌습니다.




[요시와라의 구조(신 요시와라 기준)]


요시와라는 약 2만 평 정도의 넓이였고, 외부는 논밭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미조(溝)'라 불리는 호를 파서 요시와라 내부와 외부를 격리했습니다.


1. 요시와라의 입구

요시와라는 미조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에 위치한 요시와라 대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시와라 대문은 く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길인 '오십문도(五十間道)'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이 길에는 안내역에 해당하는 찻집(茶屋, 챠야)들이 있었습니다.

대문 오른쪽에는 요시와라 내 독립 경찰조직인 '시로베에(四郎兵衛)'들이 머무르는 집회소가 있었습니다.


2. 요시와라의 거리

요시와라 거리는 십자로로 구획을 나누었습니다. 이 중 대문에서 이어지는 큰길인 나카노쵸(仲之町)는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번화가였습니다.

나카노쵸에는 상급 유녀(몸을 파는 여성)인 오이란을 소개해주는 찻집인 '히키테챠야', 교섭 성립 후 손님이 안내되는 가게인 '토로' 등이 있었습니다. 오이란이 손님을 맞으러 가는 행차가 벌어지는 곳이었고, 봄에는 나카노쵸 벚꽃놀이가 열렸습니다. 원래 나카노쵸에 벚나무를 심어 기르는 게 아니라, 봄에만 옮겨와 심었다가 꽃이 지기 전에 모두 뽑아버렸습니다.

나카노쵸에서 뻗어나온 골목길(横町)들에는 보다 급이 떨어지는 가게들이 자리했고, 외곽 지역인 미조 강기슭에는 그보다도 아래인 가게들이 자리했습니다.


3. 요시와라의 가게

요시와라의 가게는 주로 녹색 칠로 겉을 장식했습니다. 요시와라의 가게들에는 등급이 매겨져 있었으며 이 등급은 화대와 평판에 따라 붙여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급일수록 나카노쵸에 있었고, 저급일수록 미조 기슭에 있었습니다.

나카노쵸의 가게는 상급 유녀를 중개하는 역할의 찻집인 히키테챠야(引手茶屋)와 실제로 유녀들을 데리고 있는 가게인 토로(登楼, 등루)로 나뉘었습니다. 이곳의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은 오이란에게 화대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은 이들이나 상류층이었습니다.


1) 히키테챠야(引手茶屋): 상급 유녀를 소개해주는 찻집. 나카노쵸에 있었습니다.

2) 토로(登楼): 히키테챠야에서 교섭이 성립되면 가는 가게. 손님은 토로 2층의 연회장에 가서 유녀가 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3) 미세(見世): 상급 유녀의 침실. 본래는 손님과 유녀가 동침하는 침실, 특히 오이란의 침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가게 자체를 일컫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대부분의 손님은 골목길에 자리한 '하리미세(張見世)'를 이용했습니다. 하리미세는 1층에 '코우시(格子)'라 불리는 격자창을 두고, 그 안쪽에 유녀들을 앉혀 놓았습니다. 손님들은 격자창 너머의 유녀들을 보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이를 지명했습니다.

하리미세에 갈 돈도 없는 이들은 변두리에 해당하는 강기슭로 갔습니다. 강기슭 구역은 '죠넨가시(浄念河岸)'와 '라쇼몬가시(羅生門河岸)'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서 급이 낮은 유녀들을 취급하는 가게를 '키리미세(切見世)' 내지 '카네미세(銭見世)'라고 불렀습니다.


가게의 등급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습니다. 위의 설명과 일부 중첩됩니다.

1) 오오미세(大見世): 상급의 가게. 오이란을 거느리고 있는 큰 규모의 가게로 주로 나카노쵸에 있었습니다.

2) 츄미세/나카미세(中見世): 중급의 가게. 나카노쵸에 있기도 하고 골목길에 있기도 했습니다.

3) 오오쵸코미세(大町小見世)/코미세(小見世): 나카미세보다 낮은 단계. 오오쵸코미세와 코미세의 차이는 화대로, 오오쵸코미세의 유녀인 '잇푼죠로(一分女郎)'는 낮 1푼, 밤 1푼이었습니다. 그보다 싼 가격인 코미세의 유녀인 '니슈죠로(二朱女郎)'는 낮 2주(1주는 1/16냥), 밤 2주였습니다.

4) 키리미세(切見世)/카네미세(銭見世): 최하급 가게. 이곳의 유녀들을 '가시죠로(河岸女郎)'라고 불렀습니다.




[요시와라의 하루]


오후 12시(정오) : 하리미세 기준으로 가게들이 문을 여는 시간. 오후 2시까지 영업했습니다.

오후 2시 : 유녀들의 휴식 시간. 오후 4시경까지 쉬었습니다.

오후 4시~오후 6시(일몰경) : 가게 영업 재시작.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옵니다.

오후 10시 : 요시와라의 대문 폐쇄. 요시와라에 들어온 손님들은 요시와라 내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오전 0시(자정) : 가게들이 문을 닫는 시간. 이 시간 이후의 유녀들은 손님과 밤을 보내거나 (손님이 없으면) 개인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 2시 : 오오히케(大引け)라 불리는 나무토막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시와라의 하루의 끝을 고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에는 가게들이 아침까지 문을 열지 않았고, 불침번 및 시로베에들만이 이따금 돌아다녔습니다.

오전 8시 : 유녀들의 취침 시간.


1640년경 요시와라를 포함한 유곽의 야간 영업은 금지되었으나, 단속이 어려운 사창이 범람함에 따라 요시와라 공창들의 야간 영업도 허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