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대문 너머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정좌하고 앉아 얕은잠에 빠졌던 톤보키리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오셨나 보군.'
그는 옷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그는 주인의 기척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낮에 원정이 끝나 돌아왔을 때, 그의 주인은 혼마루에 없었다. 사니와들의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는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톤보키리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주인이 출타하여 배웅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들이 방에서 쉬거나 각자 할 일에 열중하는 동안 홀로 마루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톤보키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풀바닥을 스치는 옷소리와 발소리를 듣고 있던 톤보키리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전 주인부터가 누군가를 섬겼던 무장이니만큼, 그에게도 그러한 예의범절은 몸에 배여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군."
"응, 다녀왔어."
주인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들렸다. 톤보키리는 인사하느라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주인이 서 있는 풀바닥에 고운 빛깔의 천이 수면의 파문처럼 퍼져 있었다. 곱게 단장하고 가셨었나 보다, 하고 톤보키리는 고개를 들었다.
"......!"
톤보키리는 눈을 크게 떴다. 볼품없게 입을 벌리지는 않았으나, 하마터면 침을 삼키는 소리를 크게 울릴 뻔했다.
사니와 키리히메는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고운 무늬가 그려진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저녁 무렵의 태양빛에도 옅어지지 않은 푸른 눈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것이었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듯 깔렸던 눈이 몇 번 깜박이더니 톤보키리를 똑바로 응시해 왔다.
부채를 쥔 손은 낙낙한 옷소매에 가려져 있었다. 평소에는 간소한 유카타를 입는 그녀였으나, 그 날은 온몸을 겹겹이 천을 둘러 늘어뜨린 듯한 화려한 의상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러 겹의 옷은 저마다 다른 색이어서 잘못 배합하면 어지러웠을 테지만, 신경써서 배치한 덕에 옷 전체가 색을 부드럽게 바닥까지 흘리고 있었다.
"미안, 연회가 끝나지 않아서. 서둘러 돌아온다고 왔는데...... 늦어버렸네."
키리히메는 부채를 살짝 기울이며 부끄러운 듯 이야기했다. 그녀의 머리에 얹힌 장식의 술과 구슬이 흔들리며 저녁놀에 반짝였다. 하얀 머리카락이 장식 술과 함께 바람에 살짝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톤보키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한순간 자신이 과거로 다시 출진한 줄 알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평소 남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는 소녀도, 역수자와 싸울 것을 명령하는 주군도 아니었다. 그 앞에는 센고쿠 시대의 히메(공주)가 되살아나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톤보키리는 무릎에 올리고 있던 손을 움직여 하카마 자락을 꽉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에서 무언가 날뛸 것 같았다. 그는 옷자락이 심장 속을 휘젓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는 센고쿠 시대에 활약하였던 명창이니만큼 수많은 무장을 보아왔다. 그가 보아왔던 무사들이 탐냈던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무공으로 쌓아올린 높은 명성을 원하는 이도 있었다. 맹수조차도 능히 물리칠 만한 무구를 탐하는 자도 많았다. 그리고, 손이 닿지 않는 절벽 위에서 고고이 노래하는 새와도 같은 히메를 원하는 자들도 못지않게 많았다. 일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가독을 이어받겠다는 야심을 불태우는 이도 있었을 터이나, 순수히 그러한 여인과 한데 얽혀 서로 연정을 불태우는 전개를 꿈꾸는 무인도 많았다.
무기였을 적의 톤보키리는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인간과 같은 육체를 얻은 후 마주하는 것은 무기였을 적과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톤보키리? 저기......"
키리히메가 가까이 다가오자 옷자락에서 향기가 풍겼다. 옷에 향을 쐰 모양이었다. 톤보키리는 더욱 제 옷을 세게 틀어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에서 엉뚱한 것이 튀어나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야기 속 공주님을 마주한 순수한 감격부터, 그 어여쁜 옷을 거칠게 풀어헤치고 싶은 욕망까지 모두 속에서 날뛰고 있었다. 까딱이려 하는 손을 누르며 그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어서 안으로 드시죠. .....공주님."
입에서 튀어나온 호칭에 누구보다 톤보키리 자신이 놀랐다. 무례를 범한 건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키리히메의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 곧 그녀는 발그레하니 물든 뺨을 부채로 가렸다. 부채 너머에서 배시시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운 호칭이네."
"그렇습니까?"
"응. 그렇게 불린 지도 몇백 년이 지났으니까."
생전의 일을 떠올릴 때의 으레 그러했듯, 키리히메는 잠시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곧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루로 올라왔다. 신을 벗을 때 한순간이지만 발이 엿보여 톤보키리는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주인이 제 곁에 올라온 후에도 톤보키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는 곁에 선 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지금껏 자신의 새로운 주인으로만 인식했던 사람이 새삼스럽게 다르게 보였다. 지금 그의 곁에서 부채를 가벼이 흔들고 있는 이는 한 명의 묘령의 여인이며, 그토록 많은 이들이 탐내던 이야기 속 공주님이었다.
"저기...?"
키리히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문을 텄다. 톤보키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후 몸을 일으켰다. 입속으로 제 살을 깨문 후 그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피곤하셨을 테니 방에서 쉬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네. 안까지 동행해 줄래?"
"...예, 말씀대로."
잠시 뜸을 들인 이유를 머릿속에서 내쫓으며, 톤보키리는 주인과 함께 사실(私室)로 이어지는 복도로 들어갔다. 침실로 쓰이는 그 방의 문이 열릴 때 자신의 이성이 버텨주기를 그는 그저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