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춤추지 않을래예?"
대련장의 문 중 하나를 열었다 닫았다 하던 아카시 쿠니유키가 문을 확 열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대련장의 나무바닥 결을 바라보던 사니와 키리히메는 제 귀를 의심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맑은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날이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강했다. 그 달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이쪽을 돌아보는 아카시의 얼굴에도 짙은 음영이 내렸다. 섬세하고 선이 고운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것도, 얇은 입술이 은근한 호선을 그리는 것도 그림자에 묻혀 인상만을 남기고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경테가 달빛을 반사하여 반짝이는 것과, 그 안경 너머로 오묘한 색의 두 눈이 뜻을 모르도록 느리게 깜빡이는 것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지금 자신이 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요괴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키리히메는 한 박자 늦게 자신의 손을 때렸다. 그는 츠쿠모가미인 도검남사이니 둘 다라는 것을 알면서.
"왜 넋을 놓고 있습니꺼, 좋음 좋다구 싫음 싫다구 하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아카시가 가까이 다가왔다. 달빛이 덜 닿을 안쪽으로 들어오는데도 이목구비는 점점 또렷하게 떠올라왔다. 키리히메는 무심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안경을 잠깐 벗어서 안경알을 닦고는 도로 쓴 아카시가 상대의 심중을 뜰 의도인지 가늘게 뜬 눈으로 제 주인의 얼굴을 건드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생각났습니더. 여기서 춤추믄 분위기 좋겠네~ 하구."
"아무도 없는데, 대련장에서?"
키리히메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자신과 아카시 외에는 아무도 없어 텅 빈 큰 대련장에서 마츠리(祭り) 춤을 추는 건 영 어울리지 않았고, 연회 자리에서 가끔 선보이는 춤은 연습도 아닌 이상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는 이상할 거 같았다. 대련장이니 카시마(鹿島), 카토리(香取)의 두 군신에게 바치는 카구라(神楽)를 청하는 것일까 했지만, 제사 준비도 안 된 곳에서 그건 그것대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당황한 눈빛을 읽은 것일까, 아카시가 눈을 고쳐떴다. 그는 줄곧 한손에 들고 있던 제 본체를 흩뜨려 감추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아, 주인, 본 적 없을라나예. 주인이 아는 그런 춤은 아닙니더."
"응?"
"다른 나라에서 추는 춤인데, 둘이 짝을 지어서 조용히 사뿐사뿐 추는 거에예. 카구라나 봉오도리 같은 게 아이라."
제 한쪽 허리에 손을 올리며 아카시가 설명했다. 그 말에 키리히메는 최대한 그 춤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 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머리를 써 보았지만, 또렷한 형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축제 춤을 단 둘이서 느릿느릿 추는 건가, 아니면 두루미가 춘다는 구애의 춤 같은 건가. 잘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워하는 사니와를 본 아카시가 하품을 하다 말고 소리없이 웃었다.
"모르나 보네예."
"상상이 안 가. 둘이서 추는 춤이 있다는 건 다른 사니와분들께 들은 적도 있는 거 같은데……."
"지두 주변은 잘 신경 안 쓰는 편인데, 주인은 진짜 안 되겠네예. 현세는 절대 혼자 가지 마이소, 세상 물정 모르는 게 딱 티가 나서 확 잡아먹히겠으니."
키리히메의 미간을 가볍게 꼭 찌르는 아카시는 뭐가 즐거운지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마를 감싸쥐었다 놓은 키리히메는 그를 흘긋흘긋 보았다. 평소 의욕을 거의 보이지 않고 느긋하게 누워서 세월을 보내는 그가, 오늘은 뭔가 달라 보였다. 조용한 의욕이 넘쳐흐르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모습에 한순간 키리히메는 아카시에게 다른 뭔가가 씌인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쉽게 뭔가에 씌일 리 없는 신령 도검남사라는 걸 알기에 그 생각은 금방 지워버렸지만, 줄곧 생각한 의문은 입으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춤은 왜……?"
"안 됩니꺼?"
"그건 아닌데… 아카시, 몸 움직이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은데 갑자기 그러니까."
"거 섭하네예. 지는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게 아이라 그냥 뭘 안 하는 게 특기사항일 뿐인데."
"그게 그거 아닐까."
안개를 헤짚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키리히메는 맥이 빠져 말했다. 그런 주인을 본 아카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다. 라이 파의 선조가 만든 국보 타치(太刀)는 그대로 주인의 손을 한손으로 건져올리며 은은한 목소리르 말했다.
"변덕입니더. 사람이 달에 홀려가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기두 한다는데 그거라고 생각하이소. 그래서, 지랑 춤추지 않을래예?"
"나, 외국 춤은 잘 모르는데."
"지 하는 거를 거울처럼 따라하이소. 그래두 안 되믄 손발 겹쳐서 알려줄게예."
마지막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얘기하며, 쿠니유키의 타치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니와가 그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반은 그 웃음에 서린 어딘가 요사스러운 안광 때문이었다.
키리히메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선 아카시를 곁눈질했다. 아카시 외에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만, 그래도 한 번도 춰본 적 없는 춤을 춘다는 것은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평소의 기모노가 아니라 하카마를 입고 있어 다리가 조금 더 자유롭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을 내쉬자, 아카시가 제 옆을 흘끗 보더니 두 팔을 살짝 벌려 들어올렸다.
무릎을 굽혀 몸을 살짝 낮췄다 도로 올린 남사는 그대로 팔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리고 또 몸을 낮췄다 들어올리며 우아하게 팔로 허공을 저었다. 그 동작을 황급히 뒤쫓아 따라하던 키리히메는 문득 아카시와 시선이 맞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움직이며 웃어보인 후, 사뿐사뿐 옆걸음을 걷듯 발을 움직여 사니와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다. 한 박자 늦게 따라서 거리를 벌린 키리히메가 고개를 들자, 달빛을 등진 아카시의 표정이 장중했다.
그대로 그는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나 한 번에 다 오지는 않고 바닥 위를 스치는 동작을 선보이며 움직이다가 하늘바람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번 몸을 크게 빙글 돌려, 자신을 따라온 사니와와 얼굴을 마주했다. 평소 의욕을 보이지 않아 정적이고 빛이 덜하던 아카시의 얼굴이 은 같은 광택을 내는 것 같아, 그리고 그에게서 뜨거운 숨결이 다가오는 것 같아, 키리히메는 하마터면 동작을 따라하는 것도 잊을 뻔했다.
"아……."
"집중하이소."
평소 목소리보다 낮게 속삭이고, 아카시는 사니와와 대칭을 이루어 빙글 돌았다. 음양의 문양을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키리히메 또한 그와 거울처럼 움직였다. 아카시가 몸을 뒤로 돌리고 서로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몇 번 더 부드러운 동작을 펼치다 다시 제 주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뒤로 물러났다.
익숙하지 않은 팔동작,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에도 키리히메는 아카시를 잘 따라했다. 사실 중간쯤부터는 아카시와 실로 연결되어 몸이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아무 음악도 들리지 않지만 어디선가 완만한 곡조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끼며, 키리히메는 몸을 빙글 돌리고 바닥에 정적인 회오리 문양을 그리듯 미끄러져 움직였다. 거리를 좁혀 다시금 마주했을 때, 아카시가 싱긋 웃은 것 같았다.
사니와와 남사는 다시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섰다. 남사가 뛰어오를 듯한 자세를 취하자 사니와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두 사람이 살짝 바닥에서 발을 뗐다가 내려앉자 텅 빈 대련장에 나무 울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그대로 몇 번 부드럽게 팔을 휘저으며 한데 발을 내딛었고, 잠시 서로를 마주본 후 다시 앞을 보면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이윽고 아카시가 동작을 거두듯 천천히 멈추었다가 가만히 허리를 숙였고, 키리히메도 그를 따라하였다. 달 앞을 한 조각 구름이 지나간 것인지 달빛이 잠깐 옅어졌고, 키리히메의 머릿속에 들리던 옅은 곡조 또한 그쳤다.
"잘 하잖아예."
아카시가 팔을 거두고 안경을 고쳐쓰면서 얘기했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내저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도 모르겠어. 아카시 하는 거 따라가느라 정신 없었는걸."
"뭐, 그런 거 같긴 했어예. 아이고, 역시 갑자기 많이 움직였더니 몸이 비명을 지르는구마. 안 하던 짓 하믄 병난다는데 그걸 까먹고 있었어예."
아이고 하고 엄살을 부리며 아카시는 제 허리를 두들겼다. 방금 전 진지한 표정으로 춤을 추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도, 그 춤의 여운에서 이어지는 듯도 한 기묘한 모습에 키리히메는 눈을 깜빡였다. 아카시가 기분 풀렸단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본 사니와는 아까 전부터 생각하던 의문을 그에게 건넸다.
"아카시는 이런 춤 어디서 배운 거야?"
"글쎄예. 오랫동안 살믄서 배운 걸지두 모르구, 며칠 전에 부랴부랴 익힌 걸지도 모르지예. 편한 쪽으로 생각하이소."
아카시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완고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자기 고집은 있는 편이었다. 의문으로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자신의 옷자락을 정돈했다. 그 때, 제 머리를 쓸어넘기던 아카시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기회 되고 마음 내키믄 또 추는 겁니더."
키리히메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이렇게 의욕을 보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이다(아카시 기준으로는 그랬다). 놀라 올려다보는 제 주인의 뺨을 쓸어 머리카락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아카시의 목소리가 느물느물 들떠 일렁였다.
"주인 움직이는 게 참 이쁘더라고예."
그 말이 진심인지 어떤지는 아카시 자신만이 알 터였다. 그 말을 입에 올린 입술이 이마에 닿은 키리히메도, 아카시의 진의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