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서(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침 무렵에는 멀찍이서 손바닥만한 크기로 꾸물거리던 구름이 지금은 하늘을 전부 덮어버렸다. 어제 같은 시간에만 해도 창살을 부러뜨릴 기세로 비쳐 들어오던 햇빛도 가려져, 평소보다 일찍 의무실의 전등을 밝혀야 했다.
의무실의 전등은 분명 전기로 밝히는 것이었으나, 그 빛은 마치 가스등의 그것처럼 침침한 면이 있었다. 오래되어 그런 것인지 본디 그런 종류인지는 모르겠으나, 코쿠라 쇼엔(小倉菖園)은 그 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목덜미를 간질이는 제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마구 긁어 흐트러뜨리며 전등을 원망스레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는 손을 멈추고 자신을 비웃는 듯 픽 숨을 흘렸다. 불을 밝히는 도구에 무슨 죄가 있으랴. 꾸짖는다면 요 며칠 간 제대로 잠들어주지 않은 자신의 두뇌에게 화살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쇼엔은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돌아가는 의자는 아직 쿠션이 눌리지도 않은 새것이어서, 그 앞에 놓인 생활감이 잔뜩 묻은 짙은 색의 나무 책상과는 잘 맞지 않았다.
“네 요청은 잘 알겠다.”
책상 너머에 앉은 청년이 말했다. 청년은 그 말을 하고서는 잠시 입을 다물었는데, 세상을 거절하듯 닫힌 입이 완고함이 느껴지는 눈매와 한 세트를 이루어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의사의 상징인 흰 가운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고, 그 아래 단정히 조여 입은 흰색 제복에도 흐트러짐은 없었다.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짧은 머리카락까지 합쳐져, 전체적으로 단단한 마호가니 나무 같은 인상을 청년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다만 단 하나, 그의 장갑 낀 손 근처에 놓인 흐트러지고 구겨진 종이 뭉치들만은 그 딱딱한 조합에서 벗어나 청년에게 마지막 인간미를 칠해주고 있었다.
청년은 쇼엔을 쏘아보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쇼엔은 불쾌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빛에 어떠한 악의도 없음을 경험에서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만나는 거의 모든 이에게 그런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발로이겠거니 하면서도 쇼엔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이 도서관의 누군가에게 권위주의적이라는 말까지 듣는 것이리라, 하고 쇼엔은 상대 몰래 한탄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네게 수면제는 처방해줄 수 없다. 네 증상은 지금으로서는 중증의 불면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사로서 소견을 밝히자면, 일시적으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뿐으로 보이는군. 지금 단계에서 수면제를 쓰는 것은 너무 이른데다 되려 독이 되겠지. 그래도 정 약이 필요하다면, 수면유도제를 조금 권할 수는 있다.”
“그럼 조금 부탁하겠습니다.”
쇼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상대는 작가가 아닌 군의(軍醫)이기도 하다. 원하는 약을 처방받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약을 정하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쇼엔도 잘 알고 있었다.
약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면유도제를 찾는 게 늦어지는 것이 미안했던 것일까, 청년은 제 환자에게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도제를 다 먹고 1주일 정도 지나도 증상에 변화가 없거나 더 심해진다면 다시 찾아와라. 아무튼 너는 누군가처럼 수면제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증상이 확실하다면 약을 내어줄 수는 있으니까.”
“또 다자이 씨입니까?”
“그 외에 누가 그러겠나. 이번 달만 들어 벌써 다섯 번째 요청이었다. 한 번은 나를 필명으로 부르면서까지 부탁하려 하더군.”
그렇게 말하며 돌아선 청년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쇼엔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꾹 참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필명인 '오가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싫어했다. 본명인 린타로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인지, 의사로서의 자신과 작가로서의 자신을 확연히 구분하고 싶은 건지는 쇼엔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후자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건 재난이군요.”
“정말이지 그렇다. 네 쪽에서도 무언가 말을 해 두었으면 한다.”
“저보다는 아쿠타가와 씨의 말을 더 들을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 말해두지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자이 씨는. 그저 가끔 자기를 너무 관철하는 것뿐이지요.”
쇼엔은 그렇게 말하며 의사에게서 약병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붉은 양복의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빙글 돌아가며 부드럽게 끼리릭거렸다.
“감사합니다, 모리 선생님. 그럼.”
작별하는 듯한 인사를 남겼지만, 쇼엔은 방을 나서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 한쪽에 있는 다른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거꾸로 뒤집힌 도자기 잔 몇 개와, 커피 냄새가 주둥이에서 감도는 큰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잔 두 개를 뒤집으며 모리 쪽을 돌아보았다.
“커피 마시겠습니까? 모리 씨.”
달라진 호칭에 모리는 서랍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려다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눈썹이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찌푸려졌다.
“카페인은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다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몫은 이거지요.”
쇼엔은 커피병 옆에 놓여있는 노란색 단지를 두드렸다. 꼭 봉해진 그것은 입구에서 끈끈한 것이 묻어났다. 꽉 봉해진 주둥이에서 달콤한 꿀 냄새가 새콤한 향과 함께 피어오르다 커피 향기에 막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썹을 폈다. 그는 아까 전까지는 자신의 환자였던, 이 도서관의 사서(알케미스트)가 커피 한 잔과 유자차 한 잔을 준비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사 일을 하는 책상에 휴식의 흔적을 남기기가 내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잔을 기울이며, 쇼엔과 모리는 바깥을 보았다.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정원을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체력 단련 중인 요시카와 씨일까, 야구 동료를 찾는 마사오카 씨일까. 밖을 보며 생각하던 쇼엔의 눈에 야구 배트가 들어왔다. 그가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다른 문호를 붙잡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쇼엔을 모리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재미있는 일이 있나?”
“마사오카 씨가 또 동료를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전생 후 건강한 몸을 얻었으니, 한껏 힘쓰고 싶겠지.”
“그럼 모리 씨가 어울려 주는 건 어떻습니까?”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늘 하이쿠를 봐 주고 있으니, 언젠가는 답례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날이 맑으면 한 번 잡혀주도록 할까.”
“다행이군요. 평소에는 늘 제가 잡혀서 캐치볼을 했으니까요. 마사오카 씨는 지금 몸으로는 쉬이 지치지 않으셔서, 한 번 캐치볼을 시작하면 날이 저물 때까지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재미도 있고 체력 단련도 되지만, 매일 하면 아무래도 피곤하지요. 이걸로 한 짐 덜겠습니다.”
쇼엔이 다시 샐쭉 웃었다. 모리는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아직 뜨거울 텐데 반 이상을 들이킨 그는 뜨거운 목을 손으로 가볍게 쥐며 잔을 내려놓았다. 쇼엔이 유자차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 말고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모리가 몇 번 기침을 하고 다시 잔을 잡아올리자 그제서야 그도 다시 유자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보다 모리 씨가 하이쿠라니, 요즘 그 쪽에 몰두하고 계신 것입니까? 일전에 관련 책을 찾아달라고도 하셨지요.”
“소설과도, 번역과도 달라 견식을 넓히기에 좋다.”
“모리 씨의 소설을 생각하면 괜찮은 작품이 나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물론 시와 소설은 다르지만, 그 바탕이 되는 표현력은 같지 않습니까.”
“너는 유화에 능하다만, 조각에도 능한가?”
그 말에 쇼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설득당해 버린다. 과연 소설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인물답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쇼엔은 머리를 짚었다.
“요즘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슬슬 새 작품에 손대볼까 하고 있었건만, 습작부터가 이 모양이니.”
“잠이 잘 오지 않는 원인은 그것이었군. 일전 네가 정원을 보며 그리던 풍경화는 완성도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며칠 사이에 갑자기 슬럼프가 온 건가?”
“그 정도 가지고 될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그림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을 겁니다. 좀 더 기교와 혼이 담긴 것이 아니면.”
쇼엔은 유자차 잔을 내려놓으며 결연히 말했다. 그의 눈이 회색으로 타올랐다. 열정이 아닌 절망감에 타오르는 차가운 불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모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어깨에 걸친 가운을 고쳐 덮었다.
“그런 말투로 말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지.”
“미요시 씨, 말입니까? 그렇군요. 늘 시를 쓰며 그런 말을 했었지요. '이런 시로는 안 된다'며. 제가 보기엔 무엇 하나 시집에 당장 실어도 좋을 명작이었는데, 미요시 씨의 눈이 꽤 높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미요시 씨는 제 그림에 대해 그대로 같은 말을 돌려주니 말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쇼엔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줄곧 흐리던 바깥 하늘에서 한순간이지만 태양빛이 뻗어나왔다.
모리는 눈을 깜빡이며 제 말벗을 살폈다. 청년이라 치기엔 작은 키가 그날따라 조금 커 보였다.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워낙 밝아서 그런 착각이 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모리는 일전을 떠올렸다. 에도가와의 트릭(이라는 이름의 장난)에 제대로 걸려들어 물감투성이가 되었던 미요시의 얼굴을 수건으로 훔치고 옷 갈아입으라며 잡아끌던 때의 쇼엔도 이런 얼굴이었지. 먼발치에서 봤던 그 표정이 지금과 겹쳐, 모리는 자신도 모르게 잔을 마저 비워버렸다. 꽤 식은 커피는 아까와 같은 맛이었으나, 향이 조금 씁쓰레했다.
“색다른 시를 쓰고 싶다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지난 번에 권했지요. 미요시 씨는 당신 나름대로 납득해 준 모양입니다.”
“색다른 경험인가. 잠서로는 부족한 모양이군.”
“잠서는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전장에 있는 군인에게 전쟁은 신선한 소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도 그렇군. 그렇다면, 자신이 잘 아는 이가 사실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는 건 어떻나?”
“............성별, 말씀입니까?”
대답하는 쇼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모리는 대답 대신 빈 잔을 잔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쇼엔의 가슴을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는 그걸 알면 세상이 뒤집어진 듯이 놀라겠지. 신선함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군.”
“제가 여성이어서, 말입니까?”
“네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기에, 라고 정정하겠다.” 모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쇼엔은 제 말상대와 다 식은 유자차를 번갈아보며 입을 다물었다. 차를 마저 마시기도, 모리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애매한 시간이 몇 초 정도 더 흘렀다. 쇼엔의 입장에서는 몇십 초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모리 씨는 제 상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몇십 초 후, 쇼엔이 간신히 내놓은 물음이었다. 모리는 눈썹을 치켜뜨더니, 허리에 찬 군도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문제에 관해 내가 옳고 그름을 내릴 수는 없다. 하물며 그도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지.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다. 다만 나 개인의 감상을 묻는 것이라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대답해 두겠다.
네가 집안을 거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 나라는 그렇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들이 정해주는 생활 방식을 따르고, 그들이 정해준 자와 혼인하는 일이 많다. 내가 글을 발표했던 때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런 면은 여전하더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양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결정이 네 집안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를 바라겠다.”
모리의 말은 묵직한 종 소리와 함께 끝을 고했다. 정각을 알리는 종이 창문 너머 어딘가에서 울려왔다. 쇼엔은 그 때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종소리 때문일까, 모리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수면 부족일까. 쇼엔은 분간하지 못했다.
종소리가 여운을 남기고 그칠 무렵, 쇼엔은 잔을 든 채 책상에서 몸을 떼었다. 그는 유자차를 마저 비운 후, 모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모리 씨. 잔을 씻어오지요. 모리 씨 것도 씻을까요?”
모리는 고개를 저었다. 쇼엔은 그의 잔을 흘끔 내려다본 후, 의무실 한켠에 있는 세면대 쪽으로 걸어갔다. 붉은 재킷을 걸친 등이 흔들거렸다.
그 등이 어떤 결단을 내렸을지, 애초에 결단을 내리기는 했을지, 모리로서는 알 일이 없었다. 그는 혀를 쯧 찬 후, 이번에는 손수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전 쇼엔이 탄 커피보다는 쓰게 될 것임을 짐작하며, 그는 아직 좀 남아있는 물을 그대로 끓였다.
창 밖에서는 그토록 두터웠던 구름층이 석양에 찢겨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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