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를 맞이한 혼마루는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대청소에 들어갔다. 첫째 날은 업무실을 포함한 본관 건물이 다다미까지 싹 뒤집어졌고, 둘째 날은 손님이 머무르는 방과 대련장이 청소로 분주했다. 이런 식으로 매일매일이 지나 이읔고 날은 마지막인 12월 31일이 되었고, 먼지떨이와 걸레를 든 도검남사들의 손길은 가장 잡동사니가 널린 곳 중 하나인 창고에 이르렀다.
"잠시 휴식! 30분 후 내부 청소에 들어간다!"
청소반장을 맡은 헤시키리 하세베가 손뼉을 두어 번 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시나노 토시로와 우라시마 코테츠가 거의 동시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물건더미 위에 엎어졌다. 몇 칸은 되는 창고에 그득히 쌓여있던 자원과 각종 잡동사니를 동이 텄을 때부터 하나하나 밖으로 꺼낸 탓이었다. 옷감 더미 위에서 앓는소리를 내는 우라시마를 나가소네 코테츠가 다독이는 동안, 난센 이치몬지가 창고 옆에 그득히 쌓인 물건들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텅 비어 휑해진 창고 중 두번째 칸을 네네키리마루가 기웃거리는 옆에선 히자마루가 창고 세번째 칸 구석에 주저앉으려던 오오덴타 미츠요의 뒷덜미를 잡고 반강제로 끌어내고 있었다.
안을 청소할 빗자루와 걸레 등을 헤아린 톤보키리는 제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완력으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그럼에도 창고의 물건을 전부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련이 부족한 것일까, 하고 남사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태만한 것만큼이나 좋지 못하다고, 일전에 주군께 고한 것은 톤보키리 자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톤보키리."
그 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톤보키리는 화들짝 놀랐다. 그 목소리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어렴풋이 떠올렸던 인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톤보키리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환청은 아니었다. 이 혼마루의 주인, 사니와 키리히메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를 띤 주인은 곱게 갠 하얀 수건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모두에게 나누어주려 가져온 것이라고 톤보키리는 금방 짐작했다. 키리히메와 함께 온 그날의 근시 후도 유키미츠의 두 팔에도 같은 수건이 청소에 동원된 다른 남사들의 수와 꼭 맞게 들려 있었던 것이다.
"핫, 주군. 무슨 일이신지요?"
"청소가 잘 되고 있나 해서. 많이 힘들 텐데, 괜찮아?"
"이제 막 물건을 전부 들어내고 휴식을 취하던 중입니다. 예정대로 오늘 해가 지기 전에는 끝낼 수 있을 테지요."
톤보키리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에서 수건 수를 다시 헤아리던 후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후도가 창고 문고리를 점검하던 하세베 쪽으로 뛰어가 다른 남사들을 불러모으는 동안, 키리히메는 다시 톤보키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품에 안고 있던 수건을 내리는 손이, 어쩐지 평소보다 동작이 느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제때제때 쉬어가면서 해 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 정도, 평소 전장에 서는 몸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닙니다."
"톤보키리라면 그렇게 말할 거 같았어. …여기, 수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키리히메는 눈앞의 창 남사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 때 톤보키리는 그것을 건네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의아함에 그가 주인을 응시하자, 키리히메는 마침 이쪽으로 돌아오는 후도를 향해 몸을 돌려서 버렸다. 그러나 그 귀가 끝까지 새빨개져 있다는 것은 주인의 새하얀 머리카락 탓에 톤보키리에게 아주 잘 보였다.
빈손으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후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후, 키리히메는 톤보키리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다시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업무 중에 짬을 내어 이쪽을 보러 온 것이리라. 주인의 배려에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하며, 방금 전 키리히메가 보인 묘한 태도에 대한 의문을 그 감사로 억눌러두며, 톤보키리는 수건을 펼쳐 제 관자놀이를 훔치려 했다.
"응?"
바닥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수건만큼이나 하얗지만 훨씬 작게 접힌 화지(和紙)였다. 바람이 불기 전 그것을 주운 톤보키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펴 보았다.
영수증이나 광고지라기엔 너무 종이가 보들보들하고 곱게 접혀 있어, 펴기 전부터 그것이 주인으로부터 온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짐작했더라도, 지금 톤보키리가 눈에 담은 그 글귀와는 다른 내용이었으리라.
「침실 등불, 밤까지 켜 두고 기다릴게」
생각보다 큰 종이의 한가운데에, 단 한 줄만이 먹으로 쓰여 있었다. 가늘고 군데군데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그 글씨체는 몇 년을 보아 잘못 볼리 없는 사니와 키리히메의 글씨체였다. 쓰인 글자들도 톤보키리가 익히 아는 그 문자들이었다. 그러나 한 번에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톤보키리는 그 말을 두어 번 더 곱씹어 읽었다. 밤이라는 글자와 기다린다는 말이 그의 눈에서 머리까지 전해지고 또 가슴 속에 닿는 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가슴이 글귀의 뜻을 이해한 순간, 톤보키리의 얼굴은 방금 전 주인의 귀끝만큼이나 붉어지고 말았다.
그는 허둥지둥 종이를 접어 적당히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얼굴 하관을 손으로 가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한 번 날뛰기 시작한 심장은 쉬이 진정해 주지 않아, 톤보키리는 불기 시작한 겨울바람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빗자루를 걷어차는 바람에 하세베가 그쪽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그것을 신경쓸 정도의 여유는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닐까…….'
창고 바닥에 쌓인 먼지와 부스러기들을 쓸면서 톤보키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린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밤에 방으로 오라고 부르는 뜻임은 확실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꼭 밀회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잖은가, 그렇게 그는 자신을 다그쳤다. 애초에 키리히메는 누군가 손을 잡아끌 때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누군가를 잡아끄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주인이 설마 한밤중에 달콤한 시간을 가지려 자신을 불렀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욱신거려, 톤보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빗자루질을 더 세게 했다. 옆에서 같이 바닥을 쓸던 난센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바람에 버럭 신경질을 낼 때까지.
'주군께서는 그저 한 해의 마지막 밤이 쓸쓸하여 이야기 상대를 구하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토록 비밀스럽게 편지를 전해주실 이유는 없을 터인데… 아니, 애당초 나는 주군 되는 분께 무슨 불경한 기대를 하는 것인가,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하아.'
물건을 도로 안으로 나르는 중에도 톤보키리의 생각은 빙글빙글 돌고 돌았다. 목탄이 가득 담긴 궤짝들을 들어 옮기는 중에도, 부서지거나 하여 남은 목탄 자투리들을 모아둔 바구니를 선반에 하나하나 올릴 때에도 사고는 끊길 줄 몰랐다. 이 결론을 내리면 머리가 석연찮아했고, 저 결론을 내리면 가슴이 안타까운 탓이었다. 오늘만 다섯 번째 한숨을 내쉬며 바구니를 선반 위에 올리던 톤보키리는, 바구니가 완전히 선반에 걸쳐지지 않았는데도 손을 떼어 버렸다.
"윽?!"
중심을 잃은 바구니는 그대로 성대하게 엎어졌다. 머리와 얼굴을 비스듬히 덮다시피 걸쳐진 바구니를 떼어낸 톤보키리는 연거푸 기침을 했다. 머리와 얼굴은 물론이요 어깨에 맨 타스키까지 목탄 가루로 뒤덮였고, 바닥에는 갈라진 목탄 자투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굴러다녔다. 손등에까지 내려앉은 숯가루가 얼굴에 묻는 것도 모르고, 톤보키리는 본능적으로 숯에 텁텁해진 입가를 제 팔로 훔쳤다.
"무슨 일인…… 아니, 설명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네네키리마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내려앉은 목탄 가루를 털어내고 나서야 톤보키리는 그를 볼 수 있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눈썹이 평소보다 내려가 있어 기가 막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톤보키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굽혀 바닥에 굴러다니는 목탄 조각들을 주워모았다.
"소란을 일으켰군. 잠시 다른 생각을 하여… 미안하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인가?"
창고 밖에서 안으로 들여놓을 궤짝을 넘겨받아 들고 오던 네네키리마루가 물었다. 톤보키리는 아직 수습에 바쁜 척 얼굴을 훔치는 시늉으로 대답을 피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용납치 않았다. 그러나 주군께 받은 비밀스런 편지의 내용으로 고뇌하고 있다고 털어놓는 것 또한 할 수 없었다. 결국 톤보키리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에 앉은 가루를 털어내며 바구니를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궤짝을 창고 안쪽에 내려놓고 돌아온 네네키리마루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지나가듯이 말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온천… 여기에는 욕탕인가, 아무튼 거기에라도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건 어떠한가."
"목욕을 하란 말인가?"
"온천에 잠겨있다 보면 얼추 생각이 정리되어, 대부분의 일은 해결되더군."
네네키리마루는 그렇게 말하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우라시마가 밖에서 숫돌이 들어찬 상자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창고에 남은 톤보키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역시 창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숯검댕투성이가 된 몸으로는 계속 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작업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하여 이탈을 용납하지 않는 하세베도, 잠시 몸을 씻고 오겠다는 톤보키리의 말은 쉽게 허가해 주었다. 얼굴의 8할 정도가 거뭇거뭇해진 몰골 때문이었으리라.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미묘한 표정이 된 히자마루와 시나노를 뒤로 한 채, 톤보키리는 본관과 별채 사이에 있는 너른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욕탕이 별채 끝에 있기 때문이었다.
톤보키리는 품속에 넣은 편지가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걸었다. 꺼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의 양손도 숯가루가 잔뜩 묻어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서 그는 답답함이 가득 찬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밤에 주군께 찾아간다면 어떤 각오로 가야 할 것인지. 가벼운 담소를 나눌 정도로 생각하고 갈지, 그보다 더욱 깊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행위를 상정하고 갈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거 누구… 으엉, 톤보키리 아녀?!"
익숙한 목소리와 독특한 억양에 톤보키리는 한 번 재채기를(목탄 가루가 코에 들어간 탓이었다) 하고는 그 쪽을 보았다. 책 두어 권을 옆구리에 낀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던 무츠노카미 요시유키 거기 서 있었다. 내번복 차림의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톤보키리를 빤히 응시했다. 그 입꼬리와 눈동자가 실룩이는 것을 본 톤보키리는 한숨을 쉬며 오른손을 내저었다.
"웃어도 되네. 스스로도 거울을 보면 웃을 몰골임이 분명하니."
"그, 그려……."
무츠노카미는 몸을 푹 아래로 수그렸다. 웃음인형을 억지로 눌렀을 때 새어나오는 것 같은 끅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소리가 멈추자 둥글게 숙여진 등이 부들부들 떨렸고, 곧 참았던 재채기를 터뜨리듯 발작적인 웃음소리가 나왔다.
"워… 워쪄다 그런 꼴이 된 거여……?"
"청소를 하던 중에 목탄이 든 바구니를 쏟았네."
"댁이 그런 실수를 한다니 희한하구마. 대관절 무슨 일이여?"
간신히 진정한 무츠노카미가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톤보키리는 어깨를 으쓱하여 애매하게 얼버무리려 했다. 그 때, 우연히 무츠노카미가 들고 있는 책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전 키리히메가 「나한테는 조금 어렵다」고 쓰게 웃으며 서고에 돌려놓던, 현대의 기계장치에 관한 서적들이었다.
무츠노카미 요시유키는 이 혼마루의 초기도였다. 제 주인과 연애감정은 손톱만큼도 없지만, 주인이 거리낌없이 단호한 거절을 내비칠 수 있을 정도로 친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격과는 반대로 입은 무겁고 눈 속의 빛은 날카로운 남사이기도 했다. 혼마루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도움을 받았던 일이 톤보키리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실은 어떤 편지를 받았네. 헌데 그 편지의 내용을 내가 맞게 해석하였는지 알 수가 없어 심중이 어지럽던 차일세."
톤보키리는 에둘러 그렇게 이야기했다. 누가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까지는 절대로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책을 가다듬어 다시 옆구리에 끼던 무츠노카미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경청하고 있음을 확인한 톤보키리는 조금 말을 덧붙였다.
"편지를 쓴 이에게 직접 뜻을 말해달라 하는 것은 실례이고, 다른 이에게 보일 만한 성질의 편지도 아닐세. 스스로 짐작한 뜻은 있으나 잘못 해석하여 쓴 이에게 상처를 줄 것이 걱정되네. 어찌하면 좋을지."
"거 참 모호하구먼. 뭔 내용을 썼는질 모르니 나가 뭐라 하기도 거시기허구……."
무츠노카미는 제 뒤통수를 빈손으로 긁적이며 눈을 두어 번 데굴 굴렸다. 역시 그러한가, 하고 톤보키리는 한숨을 쉬었다. 딱히 해결책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으니만큼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들어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무츠노카미가 시원하게 이야기했다.
"머, 주인이 쓴 거믄 허투루 쓴 건 아닐 거여. 딱히 어렵게 쓰는 편두 아니니 톤보키리가 생각한 그 뜻 아니겄어?"
"행여 그런 뜻이 아닌데 넘겨짚은 것이면 실례 중 실례가 아닌……!"
톤보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았다. 그리고 말을 끝맺기도 전 입을 다물었다. 무츠노카미는 씩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역시 주인이 쓴 편지구만. 하긴 댁이 그만큼 고민허구 공연히 걱정에 빠지는 상대는 주인 아님 없제."
"……공연한 걱정은 아닐세."
"나가 보기엔 공연혀. 뭔 내용인지까진 모르겠지만서두, 명명백백한 내용을 괜시리 이리저리 꼬아 생각하는 거 아닌가 싶으어. 톤보키리는 주인 문제만 되믄 고생을 사서 하잖여."
거기까지 말한 도사의 명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늘을 나는 곤충조차 양단했다는 창은 탈력감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혼마루의 초기도는 제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정 애매하믄 주인헌테 가서 편지 내용에 관해 지금처럼 넌즈시 말해 봐두 되지 않겄어? 그 때 주인 반응을 보믄 얼추 짐작도 가구 답도 나올 거여."
"그런가… 조언 고맙네."
"이 정도루 멀. 아, 근디 가기 전에 몸은 씻구 옷두 갈아입고 가. 댁이 숯검딩이 모습으로 나타나믄 주인이 놀라 자빠질 거여."
킬킬 웃는 소리를 뒤에 덧붙이고, 혼마루에서 제일 경력이 긴 우치가타나는 서고 쪽으로 걸어갔다. 톤보키리는 머쓱 목덜미를 긁으며 욕탕 쪽으로 향했다.
***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톤보키리는 그대로 업무실로 향했다. 업무실 앞 복도에 서자 닫힌 문의 틈새로 키리히메가 근시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괜히 평소보다 낭랑하게 들려 톤보키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소리가 목소리에 섞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인기척을 내었다.
"주군, 톤보키리입니다."
"톤보키리? 응, 들어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톤보키리는 좌상에 두루마리를 여러 장 펼쳐놓고 있던 키리히메와 그로부터 서너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후도를 보았다. 그리고 키리히메와 마주보는 위치의 다다미 위에 소리없이 앉아 무릎을 꿇었다.
"청소는 끝났어?"
"아뇨, 아직 작업 중입니다. 저는 도중에 작은 사고가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참입니다."
"저런, 다치거나 한 거야?"
키리히메가 두루마리를 한쪽으로 치우며 걱정스레 톤보키리를 보아왔다. 깊은 물색의 두 눈이 일렁이는 형상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어째서인지 아쉽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톤보키리는 다친 것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후,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때 근시석에 앉아 두루마리를 말고 있는 단도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도, 잠깐 창고 쪽에 가 줄래? 톤보키리가 여기 왔단 건, 거기에 일손이 하나 빠졌단 얘기고……."
절묘하게 때가 맞은 것인지 톤보키리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키리히메가 근시에게 말을 건넸다. 후도는 다 말아 매듭까지 지은 두루마리를 내려놓고는 씩씩한 대답과 함께 방에서 떠나갔다. 그가 소리를 낮춰 문을 닫자, 방 안에는 톤보키리와 키리히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잠깐 열렸다 닫힌 문으로 외풍이 들어와 방 안 온도는 조금이라도 내려갔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공기가 아까 전보다 느물느물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섬겨야 할 분을 언제부터 이런 감정을 갖고 대하게 된 것인가, 그런 생각이 치밀어 톤보키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뭔가 할 말, 있어?"
키리히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어조와 웃음기 옅게 깔린 얼굴은 평소와 같았으나 어쩐지 볼이 매화와 비슷한 빛깔을 띤 것처럼 보였다. 톤보키리는 잠시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채 심호흡을 했다. 속으로 셋을 센 후, 그는 윗몸을 들어 주인을 똑바로 응시하고 입을 열었다.
"예, 주군. …주신 서신, 확실히 읽었습니다."
덜컥. 좌상이 무언가에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곱게 접은 종이학처럼 단정하던 모습이 순식간에 동요를 보였다. 키리히메의 눈이 흔들렸고, 편안한 호선을 그리던 입이 긴장에 앙다물렸다.
주군께는 죄송스럽기 그지없는 생각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면서도, 톤보키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놓았다. 방금 전까지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차 있던 불안함이 옮겨간 것 같았다. 눈앞의 사랑스러운 주인이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남사의 마음은 점차 침착해졌다. 동시에 아까 전까지 고민하던 문제의 답도 순식간에 또렷이 떠올랐다. 지금껏 혹시 다른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던, 아니, 걱정하던 문장의 뜻은, 역시 톤보키리가 생각했던 그 뜻이 맞았던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주군께서 속을 숨기지 못하는 분이심이 지금만은 감사하다고 못된 생각을 하며, 톤보키리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고했다.
"서신으로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밤늦게 뵙겠습니다."
"으, 응."
키리히메는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두 눈이 빙글빙글 시선을 헤맸고, 할 말을 찾듯 빠끔거리던 입이 낙낙한 옷소매에 폭 가려졌다. 애써 두루마리에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금 톤보키리를 바라봐 오는 눈길이, 열기에 들떠 흐늘흐늘거렸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도 이러한 마음이었지, 그렇게 생각하자 남사의 저절로 쓴웃음이 걸렸다.
'주군께 감히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으나… 귀여운 분이시다.'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톤보키리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이만 물러가 보겠다는 인사였지만, 입가가 누그러지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