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찬물이 볼에 닿자 지금껏 흐릿해져 있던 사니와 키리히메의 눈에 또렷한 초점이 되살아났다. 눈가를 부비고 수면을 내려다본 후, 그녀는 그 받아놓은 물을 재차 여러 번 얼굴에 끼얹었다. 잠기운에 눌려 구부정해져 있던 등골에 힘이 들어가 빳빳하게 일어섰다.
한쪽에 걸린 수건으로 물기를 훔친 키리히메는 곧 지금껏 등을 돌리고 있던 벽을 향해 돌아섰다. 연분홍빛 네마키를 걸친 하얀 머리의 여인이 거울에 비쳤다. 끝이 처진 파란 두 눈 위로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가 눈을 덮을 듯 말 듯 흔들리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키리히메는 한손을 올려 제 앞머리를 확인하듯 잡아당겼다.
"많이 길어졌네."
그녀는 혼잣말과 함께 손가락을 옆머리로 미끄러뜨렸다. 서로 비대칭인 양쪽 옆머리 중 짧은 쪽조차도 가슴께를 넘어갈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보기 싫지는 않았지만 새삼 어색한 느낌이 들어 키리히메는 자신도 모르게 옆머리의 끝을 한손으로 조금 가렸다. 쇄골 부근에서 끊듯이 머리를 가렸던 손이 위로, 또 아래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말 언제 한 번 다듬기는 해야겠다고 중얼거리던 키리히메의 머릿속에 문득 어제 주고받았던 대화가 되울려퍼졌다.
주인이 머리를 짧게 잘라보면 어떻겠냐고 얘기를 꺼냈던 건, 정자 기둥에 기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코류 카게미츠였다. 키리히메가 그를 돌아봤을 때, 코류는 제 귓불에서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내려온 지점을 손날로 꾹 누르며 씩 웃었다. 이 정도 길이로 과감하게 모양을 바꾸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말에 키리히메도 잠시 단발머리를 한 자신을 상상하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기도 전, 다른 목소리가 그 생각을 가로막듯 튀어나왔다.
「그렇게 고운 머리를 싹뚝 자르는 건 아까운데. 나는 앞머리는 좀 다듬어도 뒷머리는 계속 기르는 걸 추천하고 싶군」
얘기한 것은 정자의 다른 쪽 모서리에 앉아 책을 읽던 다이한냐 나가미츠였다. 줄곧 두꺼운 명화 해설서를 마주하느라 아래로 향해있던 얼굴이 어느 새부터인가 앞을, 더욱 정확히는 키리히메가 앉아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제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다이한냐는 원래부터 띠고 있는 옅은 웃음을 더욱 짙게 해 보였다. 책을 아예 제 오른쪽에 덮어 내려놓은 그는 뒷머리를 가리키듯 제 목덜미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미적 감각에 기초한 사견이니까 흘려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무척 매력적이거든, 그 머리」
느끼하다 싶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그 대사에 키리히메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 코류조차도 할 말을 잃었다가, 잘도 그런 말을 한다며 뒤늦게 기가 막혀할 정도였다. 제 친족의 핀잔에도 목을 울리며 그저 웃던 다이한냐의 모습이, 그 와중에도 제 주인을 향하고 있던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그의 눈빛이 생생히 떠올랐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별것 아닌 한낮의 잡담이었을 뿐이건만, 거울 속 얼굴에는 발그레하니 열꽃이 피어 있었다. 다이한냐는 평소처럼 가벼운 농담을 했던 것뿐이라고, 혹은 그냥 제 의견을 얘기했던 것뿐이라고 그녀는 몇 번을 속으로 염불을 읊듯 중얼거렸다.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쉰 후, 키리히메는 찬물을 받아놓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 면상에 물을 다시 끼얹는 손길이 유독 거셌다.
***
세면장을 나섰을 때, 키리히메의 눈앞에 쭉 뻗은 복도 저편에 희끄무레한 사람 그림자가 서 있었다. 사니와보다 일찍 일과를 시작하는 도검남사도 없지 않으니만큼, 이 시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어느 남사일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긴 나무 복도를 따라 자신의 방까지 태연히 걸어갔다.
그러나 그 사람 그림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니와의 침실 맞은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기둥에 기대 있던 남사가 제 주인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해 왔다.
"야아, 일찍 일어나는구나."
"다, 다이한냐?"
키리히메는 말을 더듬었다. 수 차례의 물세례로 겨우 진정시켰던 열꽃이 다시 옅게 피어올랐다. 새벽이라 복도가 아직 어슴푸레한 것에 감사하며, 그녀는 겨우 다시 발걸음을 떼어 방문 앞까지 다가갔다.
"다이한냐야말로 일찍 일어났네."
"정확히는 밤을 샜지. 새벽 순찰조였거든. 이제 막 끝난 참이다."
어깨가 쑤시다는 혼잣말을 말끝에 달며, 다이한냐는 제 목을 왼쪽으로 꾸욱 눌렀다. 그의 한쪽 어깨를 가린 갑주가 관절 꺾이는 소리를 대신하듯 덜그럭거렸다. 빈틈없이 차려입은 말쑥한 검은 정장이 밤을 샌 사람 특유의 후줄근함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잘 보면 은색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있던 끈이 평소보다 느슨하게 매달려 있었다.
"피곤하겠네. 조회까지는 아직 좀 남았으니까 잠깐이라도 쉬는 게 어때?"
"음. 하지만 그 전에 전해줄 게 있어서. 이거, 네 것이지?"
그렇게 말하며 다이한냐는 정장 윗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작은 나무 참빗이었다. 익숙한 모양새, 빗의 손잡이를 가로지르는 익숙한 밝은색 띠에 키리히메는 그제야 어제 저녁 늘 갖고 다니던 빗을 잃어버린 것을 떠올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
"서고 책상 밑에 떨어져 있더군."
"언제 떨어뜨렸담… 고마워, 다이한냐."
안도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키리히메는 제 물건을 받아들려 손을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빗을 쥐고 있는 다이한냐는 손을 내밀지도, 빗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풀지도 않았다. 그저 분실물을 제 가슴 높이로 들어올린 채, 가만히 빗과 주인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가늘게 뜨여 속을 읽기 어려운 눈매 속 시선이 빗의 손잡이 부분에 새겨진 무늬에서, 손을 든 채 어리둥절해 있는 키리히메에게 옮겨갔다. 곧, 다이한냐의 입술이 평소보다 길게 퍼진 호선을 그리며 열렸다.
"그래, 이걸 주운 김에, 머리 손질이라도 도와주도록 할까."
"응?"
갑작스런 제안에 키리히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대의 사고회로를 의심할 정도로 엉뚱한 말은 아니었지만, 대답이 바로 나올 정도로 상황에 맞는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할 말을 잊고 다이한냐를 올려다보았지만, 눈앞의 남사는 응? 이라고 따라하듯 되물을 뿐 그 이상 덧붙이는 말 하나 없이 지그시 웃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싫어? 억지로 권하는 건 아니야."
"싫은 건 아니지만, 왜?"
최대의 의문을 키리히메는 확실히 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렇게 묻자, 다이한냐가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키리히메는 한순간 이상한 건 자신 쪽인가 하는 착각까지 할 뻔했다.
"이유가 필요한 건가. 그렇지, 아름다워서…는 답이 안 되나?"
"……."
키리히메는 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감각은 익숙했다. 어제 정자 위에서 다이한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뒤통수와 가슴 속을 동시에 맞은 듯한 느낌에 감싸인 상태로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곧, 다이한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쪽, 그러니까 금속 장식으로 치장하지 않은 쪽의 눈썹을 치켜뜨고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그런 표정으로 보면 상처받아. 어제도 말했을 텐데, 네 머리는 정말 매력적이라고.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그런 걸 보면 손질해주고 싶어져."
"다이한냐, 또 놀리는 거지."
"또라니. 내가 그렇게 자주 널 놀렸던가?"
남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키리히메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전체적으로 기운이 빠지는 가운데 심장만이 빠르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장갑에 감싸인 손이 톡톡 두드렸다.
"뭐, 손질이라고 해도 그냥 빗어주는 정도다. 억지는 아니니까 싫다면 싫다고 해도 돼."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키리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자르거나 물들이는 것도 아닌데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다이한냐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을 떠올렸을 때,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이상 떠올리는 것을 애써 억누르던 키리히메의 곁에서, 당사자인 남사가 꽤나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방문으로 손을 뻗었다.
"허락해주니 영광. 그럼 곧바로-"
"잠깐, 적어도 옷 갈아입을 시간은 줘."
팔을 뻗어 다이한냐의 손을 제지한 키리히메가 말을 덧붙였다. 연분홍색 네마키의 소맷자락이 다급히 펄럭이며 방문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에 다이한냐는 제 주인의 옷차림을 빠르게 눈으로 훑더니, 이내 두 손을 항복하듯 들어올렸다.
***
잠시 후, 키리히메는 군청색 전통복을 걸친 채 방 한가운데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주먹 쥔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등골이 힘을 빳빳하게 주고 있으니, 그녀의 등 뒤에서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어깨를 다독이듯 넘어왔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미술품을 다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어. 아프거나 상하게 하지 않아."
그 말에 키리히메는 자신의 머리는 미술품이 아니라고 대답할까 한순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말의 요지는 확실히 알아들었고, 말해도 딱히 바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금 기쁘기도 했고. 마지막 생각을 애써 가슴 속에 밀어넣은 키리히메가 응, 이라고 대답하자, 다이한냐가 그녀의 머리를 뒷머리 끝에서부터 건져올려 곱게 빗질하기 시작했다.
방 안은 고요 속에 잠겨들었다. 빗과 머리카락이 서로 스치는 사악사악 하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떨어져내려 사라질 뿐이었다. 말소리도, 숨소리도, 심지어 자세를 바꾸느라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키리히메는 꾹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몸을 잔뜩 경직시키고 있던 긴장은 전부 빠져나간 후였다. 쿵쾅거려 시끄러울까 걱정되던 심장소리도 평소 수준으로 잔잔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너무 긴장을 풀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정도로 그녀는 편안해하고 있었다.
다이한냐의 빗질 솜씨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머리카락을 건져올리는 손길은 정중했고, 빗을 머릿결 사이에 넣어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은 적당했다. 한두 번 정도는 잘못해서 세게 잡아당기는 일도 있을 법하건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전에 시녀들이 머리를 정돈해 주던 때에도 가끔 실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새인가 키리히메는 자연스레 웃고 있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뻣뻣하지 않은 노련한 손놀림이 그녀를 기분 좋게 해 주었다. 자신의 머리가 비단실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은 키리히메의 귓가에, 문득 정적을 깨는 나지막한 말소리가 닿았다.
"손질하고 있으니 새삼 느끼는 거지만, 네 머리 모양은, 조금 특이하군."
"역시 그렇지?"
키리히메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긍정의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양쪽 옆머리의 길이가 다르고 뒷머리조차도 한쪽으로 치우쳐 사선을 그린 모양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자르려다 실패한 것이냐고 미용사가 조심스레 물었던 때가 떠올라 키리히메는 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예전에 좀 일이 있었어. 그 때부터."
"흐음."
짧게 대답한 다이한냐는 계속 빗을 든 손을 움직였다. 언제부턴가 빗질하는 방식이 키리히메 자신이 스스로 빗을 때와는 좀 달라졌다고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넌저시 질문을 던졌다.
"보기 이상해?"
"그럴 리가. 두 번이나 말했잖아, 매력적이라고. 묶을 때에는 좀 힘들지도 모르지만, 기본 길이가 이 정도면 별 문제는 없어."
다이한냐의 목소리 사이에 빗질하는 소리 대신 천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리가 끼어들면서 멎은 빗질에 키리히메는 뒤를 돌아볼 뻔했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다이한냐의 손이 지금까지 곱게 결을 고른 머리칼을 한데 모아쥐었다.
머리를 그러모으고, 꽁지를 만들듯 내려묶고, 튀어나온 부분을 빗으로 다듬는 일련의 동작이 누가 깜짝 놀랄 새도 없이 슥슥 흘러갔다. 곧 웃음 섞인 만족스런 숨을 내쉰 다이한냐가 머리 꽁지를 그대로 키리히메의 왼쪽 어깨 앞으로 념겨주었다.
"이런 모양도 좋지. 단아한 미(美)가 더해지니까."
어깨 너머로 참빗을 돌려주며 말하는 다이한냐의 어조는 사뭇 뿌듯함에 차 있었다. 일전에 마음에 드는 화첩을 손에 넣었다고 알려오던 때의 말투와 닮아있다고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참빗을 앞에 내려놓고 손거울을 집었다.
손거울 속의 그녀 자신은 평소에 비해 보다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자라는 대로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매듭 쪽에 시선을 무심코 준 키리히메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얀 머리를 상냥히 잡아매고 있는 끈은, 언제나 다이한냐의 은발에 매달려 있던 그것이었다.
"저기, 이 끈-"
거울을 내려놓은 키리히메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하려던 말을 도중에 잊어버렸다.
긴 은발을 풀어 등 뒤로 넘긴 남사가 얼굴에 화색을 띤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본디 묶은 머리가 그리 두껍지 않아서인지 인상이 몰라보게 바뀌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붉은 눈을 눈꼬리 속에 묻으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감탄해올 때에는 더더욱 그랬다. 언제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우아함, 언제나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풀린 성숙미가 느껴져, 뭔가 주변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가았다.
"역시 내 감각은 틀리지 않는단 말이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짓는 다이한냐에게서, 키리히메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콩닥콩닥 울렸다. 눈앞의 상대가 이제와 새삼 더없이 상냥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방금 전까지 다정한 손길에 몽글몽글 풀어져 있던 마음이 불시의 습격을 받아,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불시의 습격은 아니었다. 사니와 대 남사로 만난 이래 지금까지 조용히, 착실히 키리히메의 마음 속에 쌓여와 넘칠 듯 말 듯하던 애정이, 딱 한 방울이 더 채워져 흘러넘친 것뿐이었다. 어제, 조금 전, 보통은 손발이 간지러워 비명을 지를 대사에도 두근거림을 느꼈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절로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이봐? 키리, 무슨 문제라도?"
다이한냐가 눈앞에서 휘휘 저은 장갑 낀 손에, 그리고 그가 부른 자신의 사니와명에 키리히메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한 번 설레기 시작한 가슴은 진정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간신히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가 곧 상대의 얼굴이 보고 싶어 도로 앞을 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이한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는 할 말을 고르듯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보는 건 좀 위험한데. 혹시, 이 나가미츠의 대표작에게 드디어 반하기라도?"
말끝에 붙은 미소는 어른스러웠지만 여유는 없었다. 말투는 농담조였지만 음색은 진지했다. 입은 씩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런 다이한냐를 보며, 키리히메는 쉽게 반응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한 마디로 정리당해 정곡을 찔린 여파는 컸다. 한참 침묵을 유지한 끝에, 눈앞의 남사가 몸을 뒤로 빼며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다이한냐의 입에서 좀체 나올 일 없는, 볼품없는 외마디소리가 나왔다. 붉은 두 눈이 그가 도검남사의 몸으로 현현한 이래 가장 크게 뜨였다. 놀랐을 때 키리히메가 입술을 벌린 것과 정반대로,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키리히메는 목을 아래로 숙였다. 이 분위기를, 이후에 올 반응을(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건 간에)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박동을 겨우 삼키며 세상에서 제일 긴 몇 초를 보내던 그녀에게 다이한냐의 혼잣말이 닿았다.
"……이걸 어쩐다."
얼이 빠진 문장은 당황과 헛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좋은 뜻일까, 나쁜 뜻일까. 귀만으로는 도저히 판별할 수 없어 키리히메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다이한냐는 여전히, 제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바라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해야 한다… 그거다, 주체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분명히, 또렷하게,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일전 두 사람이 현세의 미술관에 함께 갔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감동에 찬 표정과 닮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하고 다소 엇나간 방향으로 놀라고 있는 키리히메의 귓가에 낮은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껴안아도, 될까?"
그 말이 너무 분명해서 되려 무슨 뜻인가 키리히메는 몇 초 정도 고민했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아차린 순간 그녀는 고개를 침착하게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그 몸이 앞으로 홱 쏠렸다. 평소 모습에선 짐작키 어려운 조급한 동작으로 제 주인을 끌어당긴 다이한냐는 자신의 품으로 쓰러져온 상반신을 세게 끌어안았다. 꾸욱, 한아름 조이듯 품에 가두는 몸짓에 키리히메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올렸다.
"수, 숨이… 저기, 조금만 힘 좀 풀……."
"어쩌면 좋지…… 정말, 이걸 어째야 한다…… 하, 하하……."
마른 웃음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그 반응에 키리히메는 항의를 잊어버렸다. 늘 여유로이 만사에 임하던 다이한냐가 이런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것이다. 얌전히 상대의 등에 손을 올린 그녀가 최대한 힘을 주어 맞껴안자, 가슴께에서 엇박자로 두근두근 하고 울리던 두 개의 소리가 점차 하나가 되었다.
손이 풀린 것은 정말 한계까지 숨이 차오른 다음이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키리히메의 곁에서 다이한냐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숨이 차면 이야기하지."
"얘기, 했어… 그보다 다이한냐, 많이 의외……."
"무엇이?"
"그… 이것저것. 이렇게 힘이 센 것도 그렇고… 애초에 그, 늘 바랐다는 말도, 그렇고……."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간신히 끼워넣어 전해지는 말에, 주인의 등을 토닥이던 다이한냐가 눈썹을 치켜떴다.
"난 늘 말하고 있었는데. 자주 얘기했잖아? 너 같은 이를 꼬시는 것이 취미라고도, 머리가 매력적이라고도."
"농담이라고 생각했지……."
"농담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만."
쓰게 웃으며 다이한냐는 제 머리를 스윽 쓸어올렸다. 아까 전 드러냈던 서투른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키리히메가 잘 아는 그가 되돌아와 있었다. 어느 쪽이 보다 본성에 가까운 걸까, 혹시 둘 중 한 쪽은 연출인 걸까, 키리히메는 잠깐 궁금해했다.
"자, 그건 그렇고, 시간이 흐르는 건 의외로 늦군."
불쑥 튀어나온 다이한냐의 가벼운 어투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키리히메의 방 한켠, 시간 정부의 지급품인 투박한 검은 탁상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얼핏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제 주인의 어깨를 한손으로 감싸쥐었다.
"아직 조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정리해도 시간이 남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점차 낮게, 느물느물한 기운을 머금어갔다. 옷 위로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은 아까 머리를 빗어줄 때처럼 섬세했지만 아까는 없었던 질척함을 싣고 있었다.
키리히메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그녀도 연애에 대한 지식이 없지는 않았다. 딱히 그쪽 방면으로 둔감한 것도 하니고, 보통 사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즉, 지금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는 다이한냐의 제안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벽 순찰 때문에 피곤한 거 아니었어?"
"이 정도로 지치면 전장에 나갈 수 없어. 게다가 츠쿠모가미는 몸보다 마음이 지치는 게 더 치명적이지."
"모처럼 빗어준 머리, 망가질 거야."
"다시 손질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남사는 갓 생긴 제 연인의 턱을 솜씨 좋게 잡아올렸다. 여차하면 고개를 저어 뿌리칠 수 있는 세기로, 하지만 가만히 있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그 절묘함은 과연 아까 전 머리를 상냥하게 빗어주던 손길의 그것과 같았다.
말로 하는 대답 대신, 키리히메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몸의 힘을 뺐다. 그녀의 턱에서 목으로 스윽 미끄러져 내려간 손이 어깨 앞으로 늘어진 머리꽁지를 매만졌다. 아주 잠깐 아쉬워하듯 매듭을 만지작거린 후, 다이한냐는 아까 전 그 자신이 묶어준 머리끈을 스륵 잡아당겨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