籤 【타로사니】
※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길(中吉)입니다."
정갈하고 고요한 신당 안, 영석(靈石)보다도 차분하지만 방울보다도 맑은 목소리가 가만히 내려앉았다. 금색으로 손톱을 칠한 손가락이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는 것을, 사니와 키리히메는 가만히 받아들었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대로, 종이에는 중길이라는 글자가 깔끔하게 박혀 있었다. 보통 신사의 오미쿠지와는 달리 별다른 세세한 문구가 없는 것은 이것이 시간 정부에서 준비한 간이 오미쿠지이기 때문이리라.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키리히메가 웃었다.
"어제보다는 운수가 좋네. 어제는 소길(小吉)이었는데."
"그랬었지요."
"그러고 보니 어제 오미쿠지도 타로타치가 했던 것 같은데."
얇은 종이를 옆으로 길쭉하게 접으며 키리히메가 넌저시 말했다. 사니와의 맞은편, 흰 옷을 걸쳐입고 관을 머리에 쓴 도검남사는 아무 말 없이 오미쿠지를 뽑을 때 쓰는 뽑기통을 집어들었다. 안에서 나무막대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종이가 접히는 소리를 묻어 주었다.
쪽지를 새끼줄에 묶을까 그냥 가질까 가볍게 생각하던 키리히메는 곧 자신의 오늘 근시를 응시했다. 뽑기통을 돌려놓기 위해 일어선 타로타치는 한눈에 봐도 키가 컸다. 이 혼마루에서도 그보다 풍채가 좋은 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기에 액막이의 뜻을 담은 붉은 눈화장과 마주한 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가 더해져, 그는 고고하고 쉬이 오르기 어려운 영산(靈山)처럼 보였다. 혼마루의 일원으로 맞이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월에 비해 대화를 많이 나누어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행도 다녀왔으니 새해에는 조금 더 많이 가까워져서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쪽지를 들고 다니는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타로타치의 등 뒤에서 흔들리는 길게 늘어진 흑발을 보면서 가벼운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 정부에서 준비한 오미쿠지는 왜 소길까지만 있는 걸까? 보통은 흉(凶)까지 있는데."
"종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지요."
타로타치의 대답에 키리히메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상식을 벗어나는 답은 아니었지만, 쉬이 납득하기도 어려운 답이었다. 막대한 운영비가 들어가는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시간 정부가 고작 종이값이 없어 오미쿠지에 흉괘를 준비하지 못했을까. 혹은 타로타치의 방금 그 말에 어떤 중요한 은유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동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키리히메를, 타로타치가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농담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어색하였습니까?"
"아, 농담, 이었어?"
이번엔 다른 의미로 할말을 잃어버린 키리히메였다. 설마 타로타치가 농담을 할 줄이야. 그것도 이런 방법으로. 신토와 불교라는 차이는 있지만, 타로타치는 아무래도 쥬즈마루와 비슷한 농담을 좋아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미안, 한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제가 농담을 하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아서 대응키 어렵다는 것은 지로타치에게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타로타치는 우울하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중에 지로타치에게 조금은 말을 돌려서 해주라고 귀띔해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애꿏은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어색한 감은 있었지만, 조금은 기뻤다. 그 나름대로 재치를 실은 말을 던질 정도로는, 타로타치와 자신의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볼이 따뜻해져 키리히메는 줄곧 손으로 만지던 제 옆머리를 볼에 늘어뜨렸다.
"후후, 그래도 이해는 가. 한 해 시작인데 흉괘가 나오면 사기도 떨어질 테고, 시간 정부에서 배려해 준 거겠지."
"겉치레라는 것입니까."
오미쿠지의 준비물을 전부 올려둔 타로타치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말을 받았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늘어진 끈을 매만졌다. 시간 정부에서 마련하는 오미쿠지는 혼마루의, 더욱 정확히는 사니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으니, 그럴듯하게 구색을 맞추어 좋은 결과만을 준비하는 게 당연했다. 그걸 다 간파하고 일부러 쪽지를 뽑는 이를 놀리는 센고 같은 남사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키리히메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하기사, 저희가 오미쿠지를 담당하는 이상 당신이 흉괘를 뽑을 일은 없겠지요."
자리에 정좌하고 앉은 타로타치가 문득 그렇게 얘기했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들어 제 근시를 응시했다. 이것도 농담인 것일까, 아니면 좀 더 진지한 말일까. 알기 어려워 키리히메는 일단 가벼이 웃어보였다.
"배려하느라?"
"…오미쿠지란 본디 신의 의사를 묻기 위해 제비를 뽑던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비를 뽑는 이의 앞길에 어떤 길흉을 내려줄 생각인지를 신에게 묻는 의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즉, 제가 담당하는 오미쿠지는 제게 저의 의사를 묻는 것입니다."
타로타치는 찬찬히, 물 흘러가듯이 설명을 읊었다. 물이 잠시 흐름이 느려지듯 말을 끊고 숨을 삼키던 오오타치는, 곧 눈을 감았다 뜨며 확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제가 담당하는 오미쿠지에서 당신이 흉을 뽑을 일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앞길에 흉조를 내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치 신당 지붕에 하얀 눈을 내리듯 말을 맺고, 타로타치는 가만히 제 주인을 응시했다. 답을 기대하거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아닌, 그저 담담히 자신의 심정을 고하는 차분한 눈이었다.
당황한 것은 키리히메였다. 타로타치에게서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문구에 사니와는 할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파란 눈이 크게 뜨여 흔들렸고, 치미는 쑥쓰러움에 손가락이 주머니의 끈을 꽉 쥐었다. 할 말을 한참 찾듯 벙긋거리던 입은 한참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만들었다.
"그럼, 소길이나 중길은?"
"당신의 길(吉)만을 기원하는 신도 가끔은 토라질 테지요. 조금 더 저를 돌아봐 주십시오, 줄곧 다른 이들과만 담소를 나누니 서운합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심통을 부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타로타치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화수처럼 고요했다. 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따뜻해진 시선으로 사니와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읽기 힘든 한 쌍의 금색 눈이 키리히메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감싸안았다.
키리히메는 고개를 돌리는 것도, 입가를 옷소매로 가리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타로타치가 자신을 바라보는 소리를 마음 속으로 들으며, 멀리서 다른 남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