由【사다사니】
※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대 남사들이 돌아온 날, 혼마루에는 비가 내렸다. 아득히 멀리서 천둥 소리가 구름을 휘젓는 가운데, 비가 세차게 여섯 남사들의 머리며 옷을 때렸다. 그러나 옷에 물 얼룩이 퍼져가도록, 이윽고 옷 전체가 진한 빛을 머금고 축 처지도록, 아무도 혼마루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비를 맞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다들, 비 오는데 빨리 들어오지 않고."
혼마루 건물에서 하얀 그림자가 총총 뛰어나왔다. 곁에 선 근시 톤보키리가 받쳐든 우산 아래, 사니와 키리히메가 종종걸음으로 여섯 남사들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서 있던 여섯 남사들은 그 목소리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응, 응! 그래서야. 그거야."
우라시마가 얼굴을 애써 펴며 낸 목소리도, 그에 맞장구를 치는 미다레의 목소리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빙그레 웃는 마에다의 얼굴에도 어색한 구석이 남아있었고, 안경을 벗고 눈을 깜빡이는 하카타의 손동작도 평소보다 툭툭 끊기는 데가 있었다. 푹 젖은 수의를 돌돌 말아 감싸안는 닛카리도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인을 빤히 바라보는 타이코가네는 아예 평소의 활발한 태도를 싹 지우고 있어, 어색함을 넘어 이질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키리히메는 한숨을 쉬었다. 극 수행을 다녀온 남사들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오늘 시간역행군을 상대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이 다녀온 곳은 전장이 아닌, 시간 정부에서 마련한 일종의 특별한 '수련장'이었다. 그 곳에서 그들이 맞닥뜨렸을 상황을 사전에 전해들었기에, 키리히메는 아무 말도 그들에게 건네줄 수 없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감기 들겠어."
"우리는 감기 같은 거 안 걸린당께. 주인두 알잖어?"
하카타가 안경을 도로 쓰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순히 혼마루 건물을 향해 발을 옮겨 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남사들도 조금씩 발을 잡아끌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타이코가네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것을 뒤에서 바라본 키리히메는, 그가 문에 손을 얹을 때쯤에야 근시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톤보키리가 우산을 접는 동안, 키리히메는 조심스레 실내에 올라섰다. 남사들의 물 발자국이 복도에 남은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림자에 눈을 깜빡였다. 욕실로, 혹은 별관으로 향한 다른 다섯과 달리, 타이코가네 사다무네는 마치 제 주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타이코가네? 무슨 일이야?"
타이코가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 주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평소 늘 활기에 넘치다 못해 방방 뜨던 두 눈이 차분히 자신을 바라봐 오자, 키리히메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이코가네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몹시 침착한 목소리였다.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괜찮아. 톤보키리, 잠시 방에 돌아가 있어 줄래? 일이 끝나면 부를게."
톤보키리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덩치 큰 남사가 우산을 든 채 별관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타이코가네는 흘끔 쳐다보았다. 묵직한 발소리가 저멀리 사라진 후, 타이코가네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며, 키리히메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사니와의 집무실 근처에 붙어있는 응접실, 평소에는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되는 작은 방이었다. 한켠에 둔 난초를 키리히메가 톡톡 건드리는 동안, 타이코가네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제 망토를 벗어 툇마루까지 나가 쭈욱 짜고 탈탈 털었다. 그 동작은 물을 털려는 목적보다는 망토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키리히메는 그것까지는 보지 못하였다.
타이코가네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키리히메는 난초에서 고개를 돌리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타이코가네는 크게 숨을 들이킨 후, 바닥에 철퍽 주저앉으며 크게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진짜- 힘들었어!"
"수고했어, 타이코가네. 고생이 많았지?"
"알아줘서 다행. 이번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아니, 뭐 역행군 상대로 싸울 때에 비하면 몸이야 덜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말이지."
타이코가네의 말투는 일견 평소의 쾌활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히며 투덜거리는 그의 눈빛이 아직 착 가라앉아 있음을 키리히메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타이코가네의 맞은편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문을 넘어 응접실 안을 톡톡 두드렸다. 곧, 타이코가네가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구. 역사를 원래대로 지키는지 어떤지를 시험한답시고, 주인을 죽이는 놈들을 도와주는 역할극이라니."
키리히메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타이코가네는 웃지 않았다.
극 수행을 다녀온 남사들로 이루어진 1부대가 오늘 임한 수련은, 그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역사를 지키는지를 확인하는 시간 정부의 시험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일 지금 주인, 사니와가 죽는 역사라 할지라도 그대로 지킬 수 있는지를.
실제 전투와 비슷하게 구성된 훈련장에서, 여섯 남사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훈련장에는 이번 훈련에서 '죽어야' 하는 사니와의 모습이, 그 사니와를 죽이는 이들의 모습이, 그리고 역사를 바꾸어 사니와를 살리려는 세력의 모습이 있을 터였다. 남사들의 역할은 거기서 사니와를 죽이는 이들을 돕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훈련이기에 실제로는 다들 잘 흉내낸 가짜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남사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인 부담은 상당했을 터였다. 지금 주인에게 애착이 강한, 극 수행 이후의 남사들에게는 더욱. 특히, 주인에게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이코가네에게는 더더욱.
"그래도 잘 해냈잖아."
"그 사실이 더 싫다고.... 몇 번이나 관두고 싶었는지 몰라. 에휴."
타이코가네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키리히메는 또다시 쓴웃음을 머금은 채, 타이코가네의 흠뻑 젖은 머리를 살살 두드려 주었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져 다다미 바닥을 적셨다.
"역사를 지킨다는 게 대체 뭐기에 그런 것까지 감수해야 하는 거냐고."
"그게 우리의 일인걸. 잘 알면서."
키리히메는 타이코가네의 머리의 깃털 장식을 살짝 매만져 주며 그를 어르듯 대답했다. 타이코가네는 잠시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일견 그 외견 나이대에 걸맞아 보이는 그 토라진 태도는, 타이코가네가 어지간히 궁지에 몰리지 않는 이상 보여주지 않는 특별한 모습이었다.
"...주인은, 왜 이런 걸 감수하면서 역사를 지켜?"
문득 타이코가네가 그렇게 물었다. 키리히메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을 깜빡이는 키리히메에게, 타이코가네는 재차 같은 물음을 던졌다.
"주인도, 힘들잖아. 왜 역사를 지키기로 한 거야?"
"......타이코가네도 참, 어려운 걸 물어보네."
잠깐 뜸을 든 후, 키리히메는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 타이코가네의 것과 마찬가지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음정에 타이코가네는 목을 꿀꺽 울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들 사이의 공기는 다시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그 때, 키리히메가 몸을 움직였다. 타이코가네의 옆에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손을 들어 단도 남사의 귓가에 손깔대기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화들짝 놀란 타이코가네에게 눈빛을 보낸 후, 키리히메는 살짝 그의 귓가에 귓속말을 흘려넣었다.
"여기서만 말하는 비밀이야. ...사실은, 나, 역사를 지키고 싶다는 열망으로 사니와가 된 게 아니야. 그냥 어쩌다, 사니와가 되도록 명령받은 것뿐."
"그럼,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타이코가네는 괜시리 목소리를 덩달아 낮추어 이야기했다. 그 표정에는 당혹감과 순수한 호기심이 뒤섞여 나타나 있었다. 그 모습에 키리히메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생긋 웃으며 다시 귓속말을 했다.
"무서우니까."
"무서워?"
"응. 한 사람이 기억을 뼈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뼈대로 살아가. 그 뼈대가 바뀌었을 때, 나와 내 주변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변할 거야. 나는 그게 무서워. 그러니까, 지키는 거야. ...치졸한 이유지?"
마지막 목소리는 귓속말이 아니었다. 키리히메는 타이코가네에게서 몸을 떼며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자세를 추슬러 단정한 정좌 자세로 되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귓속말에 실려 있던 미세한 두려움도 어두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타이코가네는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마르기 시작한 옷자락을 펄럭펄럭 움직이던 그는, 이읔고 멍하니 흘리듯 말을 입에 올렸다.
"......주인은, 의외로 겁쟁이네."
"그렇지?"
키리히메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추어 앉아 있었다.
타이코가네는 그런 키리히메를 줄곧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몸에 찌덕찌덕 달라붙은 의상이 그대로 말라기는 것도 잊은 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듯 큰 목소리를 내었다.
"난, 그런 겁쟁이가 좋아!"
"응?"
성량에 놀란 것일까, 내용에 놀란 것일까. 키리히메는 자세를 살짝 흐트러뜨리며 한쪽 손으로 제 몸을 지탱해 짚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타이코가네는 평소와 같은 쾌활한 모습을 조금씩이나마 되찾고 있었다.
"역시, 앞으로는 오늘 같은 역할극,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이걸로 더욱 확실해졌어."
그렇게 못박아 말하는 타이코가네의 목소리는, 조금씩 그쳐가는 빗소리처럼 점차 개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