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 【톤보사니】
※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려와 물 위에서 흔들렸다.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물 위의 빛그림자는 모습을 바꾸었고, 그 때마다 햇볕도 조각조각 부서져 연못의 수면 위에서 통통 튀었다.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은 야트막한 산 속의 못가에서는 견디기 힘든 더위가 아닌, 소박하니 아름다운 정취가 되어 있었다.
빛그림자를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던 것이 문득 물 위로 미끄러져 올라왔다. 고운 흰빛을 자랑하는 그것은 이제껏 물 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여인의 머릿결이었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머리카락은 여인의 목덜미며 뺨에 달라붙어 물방울을 똑똑 흘려떨어뜨렸다.
"후우."
사니와 키리히메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앞으로 흐른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이 등 뒤에 찰싹 닿아, 마치 몸에 걸치고 있는 흰옷과 하나로 이어지듯이 달라붙었다. 등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으로 그것을 알며 키리히메는 옷소매를 톡톡 털었다. 햇빛 때문인지 살짝 노란빛을 띠고 있는 흰 옷감이 물에 젖어 어깨며 팔의 속살을 은은하게 비쳐내었다. 가슴의 상처가 비치려나 하는 생각에 그녀는 앞섶을 재빨리 여몄다.
"좋다......"
작은 입이 감상을 흘렸다. 우거진 녹음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키리히메는 일어선 채 살살 웃음지었다. 더운 여름, 깨끗하고 시원한 연못에서 멱을 감는 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혼마루에 대부분의 남사들을 남겨두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 고개를 숙였지만, 그럼에도 입가에 한 번 머금어진 웃음은 쉬이 가셔주지 않았다.
그 때, 하늘에서 지면으로 고개를 돌린 키리히메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연못 한켠에 버티고 선 커다란 바위 너머, 진홍색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는 뒤통수가 보였다. 바람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머리카락과는 대조적으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창을 바라보며, 키리히메는 자신과 함께 온 도검남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톤보키리."
"핫, 부르셨습니까?"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도 가려지지 않는 묵직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러나 창자루가 살짝 움직였을 뿐, 뒤통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에 내리쬐는 햇볕에 다시 물 속으로 상반신을 담그며, 키리히메는 다시금 그를 불렀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잠깐 이쪽으로 와 줄래?"
"......핫, 톤보키리, 여기에."
바위 뒤에서 큰 덩치의 도검남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가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다부진 몸을 앞으로 숙인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발치에 비스듬히 내려놓은 창의 창집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일렁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군."
"무슨 일이랄 건 없지만...... 톤보키리도, 물에 들어오는 게 어때? 더울 텐데."
"아닙니다, 견딜 만합니다."
고개를 조금 더 숙이며 톤보키리는 대답했다. 그런 그를 눈을 깜빡이며 응시하던 키리히메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더워 보여. 톤보키리, 머리카락에 땀도 맺혔고."
"인간과 같은 몸이기에 땀 정도는 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더위를 타는 몸은 아니니,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으응... 하지만 나만 이렇게 물에 들어와 있으니까 미안한걸."
그러니까, 라고 말을 중간에 끊으며 키리히메는 앞으로 조금 몸을 내밀었다. 물을 헤치는 참방거리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톤보키리가 머리를 아까보다도 더 깊이 숙였다. 그는 몸을 숙인 채 얼굴을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게다가 저까지 물 속에 들어가면, 경호할 이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역수자도 요괴도 이 근처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 그러면 발만이라도."
"족욕, 말씀이십니까?"
키리히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몸에 달라붙은 흰옷의 자락을 그러모았다. 그녀의 두 눈이 계속 빤히, 자신을 호위하러 따라온 남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때문일까, 톤보키리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잠시 시선을 헤맨 후, 그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라고 말을 덧붙이며 제 옷의 신을 풀기 시작하였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갑주가 신기루처럼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곧, 남사는 하카마 자락을 걷어올린 발을 연못에 담갔다. 차가운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온몸으로 올라오자 남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때까지 굳어져 있던 얼굴의 표정을 풀었다. 진짜 인간보다야 훨씬 덜하다지만, 도검남사도 덥다는 감각 정도는 있는 법이었다.
"시원해?"
키리히메가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어느새 톤보키리의 발치에 다가와 앉아 있었다. 한 웅큼 얕아진 수심은 연못 바닥에 주저앉은 사니와의 가슴 아래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톤보키리는 급하게 시선을 멀리 하늘 위로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위 때문일까,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톤보키리, 경호한다고 계속 서 있었으니까 더울 것 같았어."
"배려에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을 깔끔하게 끝맺지 못하며, 톤보키리는 제 양쪽 무릎에 각기 주먹을 쥐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각을 잡고 앉아서 좌불안석인 양 우물거리는 모습에 키리히메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톤보키리가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격인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새삼 다시 보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 속에 앉아, 키리히메는 잠시 톤보키리의 발을 건드려 볼까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거두었다. 당황하는 것을 넘어 주인을 나무라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신 그녀는 그의 발치에서 한두 뼘 정도 물러나 몸을 일으키려 했다. 계속 연못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찬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 속에 있다가 나오면,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좋아."
"그렇습니까?"
"응. 더운 게 아니라 따뜻한 게.... 와앗?!"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키리히메가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연못 바닥의 자갈에 발이 미끄러진 것일까, 그녀는 중심을 잃고 물 속으로 주저앉으려 했다. 발만을 물 속에 담그고 앉아있던 톤보키리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텀벙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때 일어선 남사가 제 주인의 몸을 한팔로 잡아맨 것이었다. 체격 차이가 차이라 한팔에 폭 들어오는 어깨를 끌어안은 채, 톤보키리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팔 안에서 키리히메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부딪히거나 한 곳은 없으십니까?"
"괜, 찮아. 고마워, 톤보키리."
"다행입니다."
남사는 흡족히 웃으며 사니와의 어깨를 감쌌던 팔을 놓았다. 키리히메가 살짝 휘청거리며 물 속에 똑바로 섰다.
그 때, 그녀의 시선이 수면으로 향했다. 무릎 아래 정도 오는 물높이에, 안돈하카마 자락이 흠뻑 젖어 흔들거리고 있었다. 키리히메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옷이......."
"예? 아, 옷이 젖었군요."
"미안, 나 때문에."
"아닙니다, 제대로 걷어 잡아매고 있지 않았던 제 불찰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톤보키리는 초탈하게 웃었다. 처음의 잔뜩 긴장한 채 시선을 돌리던 어색함은 물 속에 떨어뜨려 녹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키리히메의 시선은 계속 톤보키리의 하카마 단에 가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남사는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이내 몸을 숙이고 물 속에 풍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에 주군께서 권하셨을 때 순순히 물에 들어올 걸 그랬습니다. 뜻을 따르지 않은 벌일지도 모르겠군요."
"벌이라니....."
키리히메는 말을 흐렸다.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톤보키리는 물 속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키리히메가 앉았을 때 가슴께까지 오는 정도의 물은, 톤보키리에게는 그보다도 훨씬 얕게 보였다.
"물 속에 있으니 한결 낫군요. 냉각수 같은 느낌입니다."
"냉각수... 그건 어떤 느낌이야?"
"어떤 느낌이냐고 물으셔도... 차게 식혀지는 기분이라고밖에는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주군께는 잘 와닿지 않을 예시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톤보키리는 제 뺨을 멋쩍게 긁었다. 여전히 볼은 붉었지만,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키리히메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생긋, 미소를 지었다. 슬슬 다시 뜨뜻해지기 시작한 몸을 수그려 물 속에 담그며, 그녀는 톤보키리의 곁에 허리를 내리고 앉았다. 물 속에서 맞닿은 팔은 차가운 듯 따뜻한 듯 기묘한 감각을 선사했다.
"주군?"
톤보키리가 아직도 붉은 얼굴로 옆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말없이 제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보인 후, 키리히메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녹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톤보키리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물 위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