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톤보사니】
※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6.10.16 검사니 60분 전력 : 단풍
잔에 담긴 호우지차(ほうじ茶)가 일렁이며 옅은 김을 피워올렸다.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구수한 향이 코를 지나 눈에까지 스며들었다. 눈꺼풀을 닫고 찻잔을 기울이는 톤보키리의 귓가에, 철이 지났음에도 남겨진 풍령이 달그랑 우는 소리가 닿았다. 풍령을 곧 치워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잔을 내려놓을 때쯤, 그의 맞은편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령을 내리는 걸 잊어버렸네."
사니와 키리히메가 잔을 내려놓으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톤보키리는 차를 다시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때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진 않아도 될 거야. 가을에도 잘 맞는 거 같고, 이 소리."
"하하, 하지만 날씨가 더 서늘해지면 춥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톤보키리가 팔찌를 위로 슥 밀어올리며 한 말에 키리히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답하며 옷자락을 다잡는 여인의 옷은 확실히 한두 주 전보다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간의 몸은 신령과 달리 추위를 타니 걱정이라고 생각하며 톤보키리는 풍령으로 시선을 올렸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초록빛 장식이 바람에 따라 빙글빙글 돌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도실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으로 향했다. 주인을 밖에 내보내 닫힌 업무실 밖 툇마루에 두세 명의 남사가 앉아 어딘가에서 꺾어온 나뭇가지를 갖고 놀고 있었다. 코기츠네마루가 단풍나무 가지를 고헤이처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이파리가 한두 개씩 떨어져내렸다. 그 옆에서는 아키타와 나키기츠네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긴 쪽이 잎을 뜯어내는 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온 카슈가 무언가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멀리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손에 든 빗자루로 보아 이 이상 청소거리를 늘리지 말아달라는 불평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는 도다누키가 입을 한 자는 비죽 내민 채 우악스럽게 비질을 해댔다. 그 바람에 기껏 그러모은 단풍잎이 훅훅 휘날렸고, 그것들이 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석등 근처까지 날아갔다. 그 곳에 마침 나왔던 카센이 이파리를 잡으며 걸음을 늦췄다. 아마도 가을 정취에 홀로 취해 있는 것이겠지. 혼마루에 성큼 다가온 가을을 그들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잎이 예쁘게 물들었어."
키리히메가 읊조린 감상에 톤보키리의 정신이 급히 다도실 안으로 되돌아왔다. 활짝 열린 다도실 문으로 작은 잎 한 장이 끌려들어와 주인의 가슴께에 앉아 있었다. 갓난아이의 이마를 겨우 덮을 만한 크기의 붉은 잎을 바라보는 사니와의 입가가 누그러지는 것을 톤보키리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번 해에는 빨갛게 물든 나무가 더 많이 보인 것 같아."
"나무의 종류의 차이는 아닐지요? 밭 근처에는 노란 단풍도 있었습니다."
"그건 보고 싶네. 밭에는 잘 가지 않았으니까."
"수확 시기의 밭은 보기 좋지요. 가 보시겠습니까?"
"그렇네, 차를 다 마시고 나면."
그렇게 말하고 키리히메는 찻잔을 다시 입에 올렸다. 톤보키리는 남은 차의 양을 흘끔 곁눈질했다. 더 우려낼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금 밖을 내다보았다. 이번에는 동료 남사들이 보이지 않는 반대쪽 문, 담장 밖의 단풍을 시선에 담기 위해서였다.
주인의 말따나마, 올해 단풍은 정말 아름다웠다.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점점 옅어지는 것도 잊고, 톤보키리는 그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는 운치나 풍류에 딱히 밝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붉게 물결치는 나뭇잎의 파도는 무척이나 고와 보였다. 나뭇가지의 진한 갈색과 섞여서 그런지 짙은 붉은색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결코 탁하다는 인상은 없었다. 감상에 취한 톤보키리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끌려나왔다.
'마치... 흩뿌려지는 피 같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는 황급히 이에 힘을 주어 입을 다물었다. 주인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읊을 만한 말이 아니었다. 잔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톤보키리는 제 관자놀이를 짚고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하고많은 것 중 하필 선혈을 떠올린 것일까, 그는 자기 자신을 나무랐다. 붉은 것이라면 불꽃도 있고, 누군가의 옷 색도 있으며, 지금 주인이 걸친 옷의 허리띠 색도 있거늘.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톤보키리는 곧 혼자 쓰게 입을 다셨다. 인간과 같은 몸을 받아 현현했지만 그 역시 본질은 엄연한 무기였다. 맹장의 손에 쥐여져 전장에서 활약하였고, 그만큼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자신의 본체, 즉 창날로 거두어왔다. 그 때문에 피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시리 손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던 톤보키리의 귓가에, 키리히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피처럼 보여?"
"예?!"
톤보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소리를 올렸다. 손에 잔을 들고 있었다면 잔을 떨굴 수도 있었다. 그가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자, 키리히메가 옷소매를 올려 제 입을 가렸다. 눈이 멋쩍은 듯 남사의 눈을 흘끔흘끔 살폈다.
"미안, 갑자기 흉한 말이었지."
"아, 아닙니다. 놀라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다른 남사들이 종종 그렇게 말했어. 잎이 전부 새빨갛게 변해서 피처럼 보인다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까?"
"가장 최근에 들은 건 야겐이랑 나가소네려나."
검이었던 적부터 피를 보았던 이들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런 감상이 나올 만한 입장이겠다 생각하며 톤보키리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렇게 보이는 이도 있겠군요. 자주 보아왔던 것에 우선적으로 비유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걸까......"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이며 키리히메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더 따라주지 않아도 된다고 손짓을 보내며, 그녀는 동행한 남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깊은 물색의 눈은 이 가을에는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고, 톤보키리는 멍하니 엇나간 생각을 했다.
"나한테는 톤보키리처럼 보이는데."
"저, 말입니까?"
남사는 눈을 깜빡였다. 거구에 다부진 체격의 남사가 당황해 귀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키리히메가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색이 단풍 색이랑 닮았어."
"옷은 아니고... 머리 이야기일지요? 스스로는 자주색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붉은빛도 띠고 있어서. 거기에 눈 색도 가을빛이고."
키리히메가 고갯짓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리켰다. 톤보키리는 자기 자신의 눈두덩이를 더듬었다. 주인의 눈에 자신의 눈이 어떤 색으로 비쳤던 것일까. 옅은 고민에 빠진 그를 보며 키리히메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톤보키리 말대로, 자주 보아왔던 걸 우선 떠올리는 건가 봐."
"그런 것... 같군요."
머쓱한 표정을 감추려 톤보키리는 제 찻잔에 손을 뻗었다. 그를 보며 발그레하니 웃는 키리히메는 가을보다는 겨울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 계절이 지나가면 자신도 주인에게 같은 말을 돌려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잔을 내려다본 톤보키리는 가볍게 놀랐다. 식어버린 갈색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