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사니와(이름 및 독자설정有)가 등장합니다
※ 드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이면 서늘해지기 시작한 계절에 저녁 목욕은 각별했다. 전투나 당번 일로 진종일 흘린 땀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적당히 식혀주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바람이 너무 차가워지니만큼, 이 소소한 즐거움은 짧은 기간 한정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뭐 하느라 안 왔대?"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빼며 오테기네가 말했다. 그보다 한 걸음 앞서 걷던 이와토오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언제 몸을 씻을지는 본인 자유이겠지. 하지만 오늘 출진했던 몸이 씻지 않으면 같은 방을 쓰는 몸으로서는 조금 그렇군."
"먼저 씻었다고 하더군. 낮에 따로 쓰기라도 한 게 아니겠나."
제일 뒤에서 걷던 톤보키리가 날벌레를 손으로 저어 쫓으며 얘기했다. 유우키 가의 창과 산죠의 나기나타는 각기 흠, 하고 그 말을 받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목욕한 직후 노곤함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어서 이불을 펴고 자고 싶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후 보초를 서러 나가야 하는 톤보키리도 쪽잠이라도 자 두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걸음을 서둘렀다.
창과 나기나타가 함께 쓰는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문을 옆으로 밀어젖히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뭐야, 벌써 왔냐."
방 안 제일 깊은 쪽에서 니혼고가 윗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머리는 부스스했지만 처진 눈에는 잠기운이 서려 있지 않아, 잠을 자다 깬 것인지 그냥 늘어져 있다 일어난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허리께까지 내려온 이불을 끌어올리며 입구를 바라보고는 일부러 소리내어 하품을 했다.
"벌레 들어오겠다, 빨리 문 닫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어, 그 자리 오늘은 내가 쓰려고 했는데!"
오테기네가 검지손가락을 세워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그는 이 방을 쓰는 네 명의 남사 중 제일 젊어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실제 나이와 관계없이 제일 행동거지가 어린 구석이 있었다. 니혼고는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픽 비웃듯 손을 가로로 저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선수친 놈이 이기는 거지 뭘."
오테기네는 뭐라고 투덜거리려 했지만 이내 말하기를 포기했다. 니혼고의 성격상 한 번 자리한 차지를 순순히 내줄 리는 없었고, 그 본인도 용을 써서까지 방 제일 안쪽에서 자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에, 하고 특유의 힘빠지는 소리를 내며 이불장을 열었고, 그 뒤에서 이와토오시가 걸걸하게 웃어제끼는 동안 톤보키리가 방문을 닫았다.
그 때, 어깨를 매만지며 안으로 생각없이 시선을 던진 톤보키리가 눈썹을 치켜떴다. 뭔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윗몸을 긁고 있는 니혼고의 이불이 이상하리만치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이불 안에서 책상다리를 하거나 무릎을 세운 것인가 했지만, 그렇다기엔 높이가 너무 낮고 넓이가 너무 넓었다. 다른 무언가를 꿍쳐넣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음식은 식당에서 먹고 들어오게. 몰래 숨겨 들어오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닐세."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냐?"
"달리 누가 있겠나."
"음식 같은 건 가져오지 않았다만. 애초에 먹고 싶으면 가서 당당히 먹고 들어오지 뭐 하러 생쥐처럼 몰래 숨겨올까."
니혼고는 스스로 한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목을 울리며 낄낄 웃었다. 톤보키리가 팔짱을 끼며 미간에 주름을 잡는 동안, 이불을 끌어내려 펴던 이와토오시가 말을 던졌다.
"허면 쿠로다의 창이여, 그 이불 속에 든 것은 무엇이지? 새 술단지가 들어왔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그 말에 니혼고는 제 다리께쯤의 이불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손을 짚고 앞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에서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손을 치우고 씩 웃는 표정을 드러내며 무언가를 암시하듯 말했다.
"술단지와는 비교가 안 되지."
방 안의 다른 세 남사가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테기네는 자기 귀를 두어 번 때렸고, 톤보키리는 굳게 끼고 있던 팔짱에서 힘을 풀었으며, 이와토오시는 호오? 하는 추임새와 함께 이불에서 손을 떼었다.
천하 삼명창 중 한 명인 니혼고는 술에 관련된 설화가 있는 창이어서 그런지 술을 무척 좋아했다. 늘상 술병을 차고 다니고, 밭일이나 마구간 일을 하러 갈 때조차도 뒷주머니에 술병을 몰래 넣어갈 정도였다. 헤시키리 하세베를 위시한 몇몇 남사가 눈총을 주어도 개의치 않고 쿠로다부시를 부르며 늘상 술을 들이킬 정도인 그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애주가였다. 그런 그가 술보다 훨씬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세 남사는 쉽게 그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때, 방 안의 네 남사 중 제일 키가 큰 나기나타가 눈을 크게 끔벅였다. 그는 자신이 깔아놓은 이불 위에 털퍼덕 주저앉더니, 입을 쩝쩝 다시다 돌연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하하, 유괴인가?"
"말 한번 정중하구만. 단어 선택에는 유의해 줬으면 좋겠는데."
"부정은 하지 못하는 것이군?"
이와토오시가 눈을 가늘게 찢으며 말했다. 니혼고는 이불 속에 한손을 넣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대답하려 했더라도 톤보키리가 끼어들듯이 던진 말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유괴라니, 이와토오시 공, 그게 대체 무슨 말......"
우직한 창남사의 의문에 이와토오시는 대답 대신 이불을 팩 잡아당겼다. 덮고 있던 걸 빼앗긴 니혼고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딱히 되잡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불 속에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쿠로다의 창이 잘 때 걸치는 낙낙한 회색 옷 옆에 길쭉하니 둥글게 붙어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솜뭉치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덩어리감과 온기가 있었고, 무엇보다 숨소리에 맞춰 가벼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하얀 것이 혼마루의 주인인 사니와 키리히메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자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째서 주군께서 여기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건가?!"
"어이, 말소리가 너무 크다. 이 녀석 깨면 어쩌려고."
톤보키리가 얼굴이 벌개져 언성을 높이자 니혼고가 능청스레 제지했다. 톤보키리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대신 눈을 매섭게 치켜뜨는 것으로 소리없이 항의했다. 목소리를 낮춘 채 무어라 말을 해야 강력하게 뜻을 전할 수 있는지 헤매는 눈치였다.
그 때. 줄곧 우두커니 서 있던 오테기네가 다다미 바닥을 저벅저벅 걸어왔다. 주인을 제 옆에 끌어안고 이죽대는 동료의 곁까지 다가온 그는 다짜고짜 니혼고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퍽 후려갈겼다.
"무슨 짓이냐. 불만 있으면 말이나 창으로 하라고."
"누가 주인을 멋대로 업어오래?"
오테기네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는데, 사실 기가 막힌 나머지 맥이 빠진 것이었다. 니혼고는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입속으로 뭐라 투덜거리다 콧바람을 픽 내뿜으며 느물거리듯 말했다.
"그럼 이 녀석 침실로 내가 가는 편이 나았겠나? 그 편이 더 위험했을 텐데."
다른 두 창남사가 뭐라고 말을 터뜨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표정은 톤보키리 쪽이 더 얼굴이 시뻘겋다는 것만 빼면 거의 비슷했다. 창자루로 방금 그 말을 한 자의 얼굴을 치고 싶다는 의지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헤이안 태생의 나기나타만이 재미있어하는 건지 반격할 틈을 찾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가만히 상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니혼고는 태연자약하게 하품을 했다. 그는 저만치 밀려나간 이불을 다시 끌어당기더니 자리에 누우며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빨리 이불 펴고 자라. 이 녀석 깨겠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불을 펴서 자신과 사니와를 한데 덮었다. 사니와를 끌어안으려 몸을 돌리고 눕자 오테기네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녀석, 여기서 재우게?!"
"그럼 왜 데려왔겠냐? 이 쪽은 신경 끄고 어서 자라, 자."
"허튼 소리 하지 말게."
톤보키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옅은 웃음을 띠고 있어 인상이 흐려지지만, 표정을 굳게 하고 있으니 장대한 기골이 한층 위협적으로 두드러졌다.
"멋대로 굴지 말게. 당장 주군을 사실로 모셔가야겠으니 내놓게나."
"해 보겠다는 거냐? 좋지, 덤벼봐라. 같은 삼명창이라고 봐 주거나 물러나는 건 없다."
니혼고는 누운자리에서 고개만 돌려 상대를 올려다봤다. 톤보키리가 눈을 부라리고 쳐다봤지만 니혼고도 그 정도로 겁을 먹을 만한 이가 아니었다. 진홍빛 머리의 남사는 지금이라도 주인을 들어올려 모셔가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검은 머리의 남사는 눈을 붉게 빛내며 사니와의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이 자리에 폭약을 갖다두면 바로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다른 건 그렇다치고, 주인이 지금 꽤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소란 때문에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을까 걱정되지 않나?"
턱을 괴고 쳐다보던 이와토오시가 벌렁 드러누우며 지적했다. 확실히 키리히메가 잠결에 신음을 흘리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니혼고는 혀를 차며 손의 힘을 풀었고, 톤보키리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둘 다 여전히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적어도 서로를 노려보는 건 관두었다.
머리를 짚으며 재차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톤보키리의 옆에서, 오테기네가 메밀을 채운 베개를 휙 던져 굴렸다. 자리에 누우며 그가 남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잣말을 했다.
"저 녀석 잠들면 슬쩍 빼내서 제자리에 돌려놔야지."
"꿈도 꾸지 마라, 누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뺏길까."
니혼고가 쯧 혀를 차며 도로 다른 세 명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다른 세 명의 눈이 거의 동시에 그 등에 매섭게 꽂혔다. 그러나 정 3위의 창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되려 다정한 모습을 과시하려는 듯, 사니와의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제 품에 꾹 눌렀다.